바쁜 딸을 대신해서,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외손녀의 '첫 학부모 모임'에 참석했다. 모임 장소인 도서실로 들어서니, 담임인 미스 켈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반갑게 맞이해 준다. 개학 첫날, 긴 머리를 한 갈래로 단정하게 땋아왔던 그녀는 어느 새 상큼하게 자른 단발머리로 변신하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오목조목한 얼굴, 그리고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맑은 눈망울과 연신 입가에 미소를 물고 있는 그녀는 산소 미인 이영애를 연상케 했다. 순수 백인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동양적인 매력을 지닌 듯해 친밀감이 가거니와, 떼 묻지 않은 그녀의 청순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먼저 온 학부모들에게 눈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으려 하니, 뜻밖에도 미스 켈리가 행운권 티켓 한 장을 떼어주며 뒷면에 이름을 써서 통에 담으라고 한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윈'하면 상품이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학부모 모임에 행운권 추첨이라. 나는 이 별난 주문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젊은 사람이라 학부모 모임도 재미있게 진행하는군'하며 그녀의 은밀한 장난에 즐거이 동참했다. 자리에 앉아 있는 다른 학부형 얼굴에도 동심 어린 웃음이 번져 있었다. 모두가 나와 똑 같은 느낌을 받은 듯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다른 학부모 모임에서는 보지 못한 소품 몇 개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마실 물 한 병과 'They'라고 적힌 노란 스티커, 그리고 'Math'와 'Language Arts'란 타이틀 아래 영어 문장이 빽빽한 A4 용지 한 장. 이 세 가지 소품이 나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시험지 같이 생긴 A4 용지는 얼핏 봐서 앞으로 가르쳐 줄 교과 과정을 설명한 듯 한데, 듣기만 할 우리에게 물 한 병을 주는 이유는 무엇이며, 'They'라고 적혀 있는 이 노란 스티커는 또 뭐란 말인가. 책상마다 붙여져 있는 노란 스티커가 반칙 선수들에게 주는 '옐로우 카드'인 양 신경 쓰이게 했다. '설마 우리에게 스피치를 시키거나, 이 단어를 이용해서 에세이를 쓰라는 건 아니겠지'.
자세를 가다듬고, 수험생이 아니라 학부모 자격으로 온 자신을 다잡았다. 다른 학부형들은 '옐로우 카드' 따윈 아랑곳없이 서로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한국 사람, 아니 동양인은 나 혼자다.
마침내 모임 시간이 됐는지, 미스 켈리가 예의 그 상큼한 웃음을 머금고 우리 앞에 섰다. UCLA출신으로서 퀸 앤 스쿨은 두 번 째 부임지라며 삼 년 차 교사라고 간단한 본인 소개를 했다. 자기가 설명하는 동안 언제든지 질문을 해도 좋다며, 질문을 하다가 목이 마르면 앞에 있는 병 물로 목을 적셔가면서 하라는 농담까지 곁들였다.
A4 용지를 들더니 'Teaching Responsibility'에 대해서 조목조목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설명해 가는 그녀의 목소리는 자신감에 넘쳤으며, 낭랑한 목소리는 창가에 앉아 지저귀는 새벽 참새 소리처럼 맑고 고왔다. 매주 월요일에는 과제물을 가져와야 하며, 절대로 하루만에 후닥닥 해치우게 해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그것은 매일매일 조금씩 공부하는 습관을 길러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숙제하는 시간은 일정한 시간을 유지해야 공부 습관이 붙을 것이며, 조용한 분위기와 알맞은 조명은 필수라고 강조했다. 아이 공부하는데 조명까지 신경을 써 주라니, 그건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다.
연필, 지우개. 풀, 가위는 물론이고 크레용이나 모든 문구류를 한 통에 정리해줌으로써 시간 절약과 정돈하는 습관을 길러주는 것도 부모님들이 해야할 역할이라고 했다. 자기는 교실에서 사용하는 모든 문구류를 이렇게 정리해 주고 있다며 작은 플라스틱 가방 하나를 열어 보였다. 그 속에는 깔끔하게 정리된 각종 문구류가 서로 키를 재며 들어 있었다. 99센트 스토어에 가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싸구려 플라스틱 가방이, 자상한 선생님의 손길을 한 번 그치고 나니 명품 가방 보다 값져 보인다. 바쁘다는 핑계로 일일이 챙겨주지 못했던 부모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미안함 때문인지 미스 켈리의 눈길을 사선으로 피했다.
A4 용지 뒷면에는 3개월에 걸쳐 배울 산수 범위와 가르치는 방법이 자상하게 적혀 있었다. 덧셈과 뺄셈은 두 자리 숫자로 예를 들어 놓았으며, 시간에 대한 개념과 기본 십진법, 백 단위에 따른 큰 숫자와 작은 숫자가 부등호로 표시되어 있었다. 마켓에 가거나 집에 있을 때에도 자연스레 기본 개념을 익힐 수 있도록 끊임없이 숫자게임을 하라고 일렀다. 미스 켈리는 재미있는 예를 들어가며 열심히 설명을 해준다.
거스름돈이나 콩, 옥수수 알, 바둑돌 모두가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으며, 줄넘기 시합과 훌라이프 돌리기도 좋은 숫자 게임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이 숫자와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전깃줄에 앉은 새 떼도 덧셈 뺄셈의 좋은 게임 도구요, 잔디 위에 떨어진 은행잎도 자연의 아름다운 숫자 도구였다. 누가 그랬던가. 시인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깨우쳐줄 뿐이지만, 선생이란 미처 모르고 있는 것을가르쳐 준다고. 비록 코흘리개 초등 학교 교사에 불과하지만, 미스 켈리가 새삼 시인 보다 더 우러러 보였다.
나는 할미가 되어 외손녀를 거의 도맡아 키우다시피 하면서도, 마주 앉아 이런 숫자 게임을 해준 기억이 없다. 옥수수를 사 준 적은 있어도, 그 옥수수 알로 덧셈 뺄셈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너는 왜 그리 셈하는 게 느리냐고 다그치기만 했다. 심지어 이 애는 학구열이 없군, 하면서 지레 결론을 내려버리기도 했다. 이 얼마나 위험한 단정인가.
자책을 하는 사이, 미스 켈리는 유창한 말솜씨로 'Language Art" 설명에 들어간다. 앞으로 3개월 동안 아이들에게 문장과 문단을 정확히 쓰게 하고, 일 분 동안 쉰 다섯 단어 이상 읽어내는 훈련을 시킬 것이라고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문제의 노란 스티커를 집어들었다. 웃음을 베어 물며 맑은 눈망울을 굴리던 그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예기치 못한 질문이라도 할까봐 가슴이 뜨끔했다. 우리 낱말로야 시조 삼행시나 오행시를 지어라 하면 못 지을까. 하지만, 영어는 'They'가 아니라, 'The'만 봐도 심장 박동수가 빨라진다. 언젠가 학부모 모임에서 느닷없는 질문을 받아 낭패를 본 이후로는, 주로 뒷자리에 가 앉는 편인데, 오늘은 잊어버리고 그만 턱 밑에 앉고 말았다.
슬그머니 눈길을 피하고 있으니, 뜻밖에도 노란 스티커로 효과적인 스펠링 공부 여섯 단계를 설명해 주겠단다. 먼저 'They'라는 글자를 보여준 뒤, 무슨 단어가 떠오르냐고 물었다. 우리는 마치 초등학교 2학년생이라도 된 듯이 장난기 있게 'The'하고 대답했다. 미스 켈리는 바로 그거라며 처음부터 단어 전체를 가르치려 하지 말고 짧은 단어부터 연상시키면서 붙여나가라고 했다. 'Look at the word, Say the word, Cover the word, Spell the word, Check spelling, Repeat'. 그녀는 이 말을 여러 번 반복시켰다. 우리는 미스 켈리가 지시하는 대로 교생 실습을 하듯 따라했다. 그런데, 신경 쓰이게 했던 그 '옐로우 카드'가 바로 스펠링을 가르치기 위한 연습 카드였다니! 주인 앞에 선 머슴처럼 괜시리 주눅이 들었던 내가 우스워 혼자 실소했다.
약 한 시간 반 동안, 새벽 참새같이 재재거리며 즐겁게 학부모 모임을 이끈 미스 켈리. 학부모 모임 하나도 교생 실습을 하듯 꼼꼼하게 준비한 그의 섬세함과 열정적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교사를 일러 '아이들의 영혼을 가꾸는 정원사'라고 한다. 미스 켈리라면 외손녀의 영혼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영혼에 단비를 준 초등 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처럼, 그녀도 내 외손녀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선생님이 되리라 믿는다.
행운권 한 장을 뽑아, 환호하는 당첨자에게 명품(?) 가방을 안기는 그녀의 모습이 더욱 다사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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