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성적이 발표 나던 날, 아내는 베란다에 서 있었다.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두 손을 꼭 쥐고 바깥만 바라보았다. 아내는 아들을 기다렸다. 제 자리만 맴돌던 아내가 급히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아들 녀석은 거실로 들어오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현관에서 미적거렸다. 아내가 아들 녀석을 데리고 거실로 들어왔다. 내 앞에선 아들 녀석은 성적표를 내놓지 못하고 한동안 눈만 껌뻑거렸다. 제 어미가 괜찮다고 몇 번이나 타이르고 나서야 아들 녀석은 주머니에서 겨우 성적표를 꺼냈다. 하지만 아들 녀석은 나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움켜쥐고만 있었다. 보다 못한 아내가 아들 녀석의 성적표를 받아 나에게 대신 건넸다.
“이래가지고 대학 가겠냐!”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를 질렀다. 아내가 걱정스런 얼굴로 내 앞을 가로 막았다. 아들 녀석은 나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성적표를 소파에 내 팽개치고 베란다로 나가 아내가 서 있던 자리에 섰다.
“이 겨울에 땀 흘리는 거 좀 봐. 매정한 사람. 실수했다고 하잖아요.”
아내는 내 뒤통수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아들 녀석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았다. 아내가 내 옆으로 달려와 나를 흘겨보았다. 아내의 눈이 젖어 있었다. 아내는 벌써부터 속으로 울고 있던 모양이었다.
“가서 쉬어라.”
나는 등 뒤로 아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던졌다. 그제야 아들 녀석은 제 어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자정이 지나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거실로 나왔다. 낮에 본 아들 녀석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들 녀석 방문을 열어보니 불이 꺼져 있었다. 아들 녀석은 벽을 보고 웅크리고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들 옆에 앉았다.
“자냐?”
아들 녀석은 대답이 없었다. 아들 녀석 볼이 희미하게 번들거렸다. 아들 녀석 볼을 만져 보니 귓불까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만 울어라.”
나는 아들 옆에 등을 맞대고 누웠다.
"이제 자거라“
나는 새벽이 되도록 혼자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해, 어느 겨울밤이었다.
“서울로 학교 갈 겁니다.”
“안 된다. 돈 없다.”
늦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한마디가 귓전에 맴돌았다. 따르고 싶지 않았지만, 거역할 수 없었다.나는 입학 원서를 갈기갈기 찢어 방바닥에 던져 버렸다. 벽을 보고 웅크리고 누웠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자정이 지나 방문이 얼렸다. 술 냄새가 났다. 흐릿한 그림자가 내 등 뒤에 앉았다. 가끔 한숨 소리가 들렸다. 잠이 설핏 들 무렵 거칠고 큰 손이 내 손등을 감쌌다. 그 손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손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손을 뿌리쳤다. 그 손은 어둠 속에서 말더듬이처럼 멈칫거리고 있었다. 나는 잠이 들었지만 그 그림자는 떠나지 못하고 내 등 뒤에 앉아 있었다. 그 날 이후로 그 큰손과 내 손은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내가 늦깎이 군 입대를 하던 날이었다. 아버지는 환송객 속에 서 있었다. 나는 입대 장정들과 줄을 맞추어 걸어가고 있었다. 조교가 걸음을 멈추게 하고 환송객을 향해 뒤로 돌아서게 했다. 환송객들은 장정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버지의 손은 그날 밤처럼 주저하고 있었다. 내 손도 아버지의 손처럼 멈칫거렸다.
“새끼야, 힘차게 흔들어!”
조교의 거친 독려를 듣고서야 나는 팔을 머리 위로 들어 힘껏 흔들었다. 아버지의 손도 내 손처럼 멀리서 흔들고 있었다.
아들 녀석은 잠이 들었다. 나는 잠들지 못하고 아들의 등 뒤에 앉았다. 창문이 희미하게 밝아 왔다. 새벽이었다. 아들 녀석 손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들 녀석의 손은 제 할아버지의 손을 많이 닮았다. 손마디가 굵고 투박하다. 고지식한 손이다. 오래 전 그날 밤 어둠 속에서, 아버지는 아들이 뿌리쳐 버린 당신의 가난한 손을 원망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때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지 말고 차라리 잠든 척 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나는 잠든 아들의 손을 살며시 잡아 보았다. 어둠 속에서 혼자 우시던 내 아버지가 나에게 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