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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이 따라오고 있었다. 비에 씻기운 듯 맑고 밝은 달이었다. 달빛 아래 잠든 산마을 집들은 부드러운 형광 빛에 싸여 신비롭게 보였다.  
   ‘오늘이 보름인가?‘ 혼자말처럼 뱉았다. 묵묵히 운전을 하고 가던 남편이 그럴거라며 짧게 받았다. 언제나 단답식으로 말하는 남편이 오늘따라 더욱 무드를 모르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늘은 그 단답식 대답도 별로 밉지가 않다. 달빛을 받으며 달과 함께 집으로 가는 길에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으랴. 오히려 ’느낌‘만이 소중한 시간인지도 모른다. 

   높이 뜬 보름달은 날 잘 따르는 우리 집 강아지처럼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으면서 계속 따라 왔다. 내 눈도 달을 따라간다. 나와 눈맞춤한 달은 어느 새 내 마음까지 앗아가 버렸다. 이젠 달이 날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달을 따라가는 셈이 되었다. LA 다운타운에서 내가 사는 리틀락까지는 장장 80마일. 호젓한 밤길이라 빨리 달려도 족히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다. 한 시간의 데이트. 별로 나쁘지 않다.
   한 때는, “고작 한 시간!”하고 토라져서 아예 만남 자체를 거부한 적도 있었다. 떠나기 전에, 단 오 분만이라도 뵙고 싶었습니다라는 편지를 받고서야, 유아적인 나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꼈었다. 내 젊은 날, 연인과의 한 시간은 너무 짧게 생각되었다. 지금이야말로 나 역시 만날 수만 있다면 단 오 분만이라도 만나고 싶다. 만나서, 부끄러웠던 일, 미안했던 일 다 용서 받고 싶다. 하지만, 저 달은 떠올라 옛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는 꿈에서 조차 찾아주지 않는다. 꿈길에서도 어긋나는 걸 보니, 흘러가 버린 세월만큼이나  먼 길로 떠났나 보다. 이젠 삼십 년이 다 된 이야기다.
   휘영청 높이 뜬 달은 여전히 유정하고 낭만적이다. 눈부시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끌어당기는 달빛 사랑은 상당히 은유적이다. 현란한 네온 사랑이 아니라, 은은한 형광 불빛 사랑이라 좋다. ‘침묵 속의 공감’만으로도 마음에 물무늬 지는 사랑. 이런 사랑을 잠시 꿈 꿔 보는 것도 달밤 아래서는 무죄가 될 것 같다. 둥근 보름달은 생긴 그대로 우리 마음을 둥글둥글하게 해 준다. 사랑도 미움도 그저 둥글둥글하게 생각하다 보면 몸도 마음도 밝아지리라 한다.
   프리웨이를 달리며 구불구불 산길을 돌 때마다 오른 쪽 왼쪽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달이 재미있다. 맑은 얼굴에 얼비치는 옥토끼는 오늘도 많은 동화를 지어내고 있을까. 골짜구니에 서리서리 어린 이야기는 장편 소설로도 모자라 한숨짓고 있을지도 모르지. 한 마디 말도 없이 우리를 미소짓게 하고, 눈물샘 없이도 눈물짓게 하는 저 달. 나도 모르게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저 달 보고 웃는 사람, 저 달 보고 우는 사람, 서울의 지붕 밑에 ......” 그 다음 가사는 생각이 나지 않아 허밍으로 대신했다. 그런데 가사 내용 때문일까. 아니면, 달이 주는 감상 때문일까. 괜히 쓸쓸한 기분이 들어 노래 소리는 잦아들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달을 보고 울었을까. 윤오영 선생의 ‘달밤’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장기려 박사의 ‘달님’이 들어섰다. 인술로도 유명하지만, 사십 평생 북에 두고 온 아내를 잊지 못하는 그의 순애보가 사람들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언젠가 장기려 박사와 김동길 박사가 미국에 왔었다. 그날 밤도 보름달이 떴었나 보다. 장기려 박사는 습관처럼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김동길 박사가 넌지시 다가와 달이 참 밝지요하고 말을 건넸다. 그때 장기려 박사는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국에서 보는 달은 재미가 없으이. 하루가 틀리니, 북에서 저 달을 보고 있는 내 아내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보는 달이 아니잖어. 그러니까 재미가 없으이.” 독백처럼 뱉는 말에 그의 속울음이 들리는 듯하여 김동길 교수도 할 말을 잊었다고 했다. 이북에서도 아내가 저 달을 보고 있을 거라는 믿음. 허망한 믿음일 수도 있는 그 믿음이 그에게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한 힘이 되었으리라.  
   똑 같은 달이라도 똑 같지 않은 달이 누군가의 가슴에 있다. 오늘의 달을 보며 어제의 달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고, 아팠던 지난날이 생각나 다시 눈물 짓는 사람도 있으리라. ‘저 달 보고 웃던 사람, 저 달 보고 울던 사람’은 서울의 지붕 밑에만 있는 게 아니고 이 LA 하늘 밑에도 무수히 있겠지. 하물며 물설고 말이 선 이 곳에서의 외로움이나 어려움을 달 외에 누구한테 털어놓을 수 있으랴. 운전대에 이마를 찧으며 흐느끼는 사람도 달을 보며 울고, 개나 늑대도 달을 보며 사연 있는 울음을 운다. 달은 이 모든 사연을 가슴으로 받고 함께 아파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은빛 자락으로 우리의 이마를 쓰다듬어주는 일 뿐. 달이 잠들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나 또한, 사춘기로 흔들리던  딸과 함께 운 날이 몇 날이었던가. “우리, 이렇게 살려고 미국에 온 거 아니잖아?”하며 핸들에 고개를 박고 울 때마다 달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울어 지쳐 잠든 딸 이마 위로 가만히 내려앉던 은빛 달빛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밖에 없다고 타이르던 달빛 은유. 그 은은한 형광 빛 타이름에 우리는 다시 제자리로 올 수 있었다. ‘미움으로 흘리는 눈물은 없다’고 오늘밤 보름달은 다시 한 번 내게 일러준다.  
  팜트리 잎새 위에 걸린 보름달도 감나무 위에 걸려있던 고향의 보름달 못지않게 포근하고 운치가 있다. 노래를 부르고 싶다. 어제의 일은 어제의 바람이 다 쓸어갔겠지. 내일은 또 내일의 바람이 불겠지. 허밍으로 부르는 노사연의 ‘님 그림자’가 리틀락의 밤하늘에 조용히 퍼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