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조각가.jpg                                         

  

   일어나지 않으면 좋을 일들이 하루에도 몇 번 씩 일어나는 것이 우리네 삶인가 보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랬다. 신문사에서 같이 일했던 황부장이 뜻밖에도 부고란 한 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몇 년만에 만난 연극 공연장에서 미세스 지도 이런 데 다 오느냐며 눈에 반가움을 가득 담던 그. 고생스럽던 이민 초기 시절, 한솥밥을 먹던 사람이라 이토록 가슴이 서늘한 것일까. 드는 정은 몰라도 나는 정은 안다더니,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생각에 잠겨 멍하니 앉아 있노라니 요란스레 전화벨이 울렸다. 뜻밖에도 어머니다. 심장병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의 전화는 늘 긴장시킨다. 오늘따라 어머니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마치 배추에 청소금을 친 듯, 축 처지고 힘이 없어 보인다. 또 어디 편찮으신 걸까, 아니면 한국에서 좋지 않은 전화라도 온 것일까. 마음이 다급해진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게 웬 말인가. 한국에 계시는 외삼촌이 암에 걸려 시한부 생명을 살고 있다고 한다. 그것도 급성이라 오늘 내일을 장담 못한다는 거였다. 외삼촌이? 그렇게 건강하시던 분이? 순간, 나도 충격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우선 어머니의 심적 충격을 완화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사실, 생명권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신의 재량권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심약한 어머니가 어떻게 수용할 수 있겠는가. 기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도밖에 없음에도 차마 그 말을 해 줄 수가 없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는 때로 화만 돋울 뿐이다. 이럴 때는 차라리 마주 앉아 어머니의 푸념을 들어주는 것이 상책이리라. 공동의 추억을 상기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다.
   나는 곧 차에 시동을 걸었다. 달리는 차창으로 신록이 한창이다. 내 마음과는 묘한 대조를 이룬다. 가로수는 저마다 아름다운 꽃과 풍성한 잎을 흔들며 생명을 노래하고 있었다. 대지를 꽉 움켜진 뿌리는 설령 내일 죽음이 올지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초연한 자세다. 그런 든든한 삶에 질투를 느끼는 것일까. 어제를 휩쓸고 온 바람이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지나간다. 평온한 삶에 궂은 일이 생김과 같다. 떨어지는 잎들도 한 동안 몸을 뒤틀더니, 이내 체념한 듯  대지에 안긴다.  처음엔 불응하다가  끝내는 순응하며 신의 부름에 응하는 것. 이는,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의 숙명이지 싶다.  하지만 어찌하랴. 삶에 대한 의지와 죽음에의 초연은 우리가 배워야할 또 하나의 과제인 것을.
   그 순간, 자칭 ‘대지의 조각가’라며 껄껄 웃던 외삼촌 모습이 떠올랐다. 유난히 삶을 사랑했던 외삼촌은 일본에서의 고학생활도 달게 하셨다. 그는 고생담도 만담 같이 재미있게 해 주는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심심하면 조카들을 앉혀놓고 얘기하기를 좋아하셨던 외삼촌은 그 날도 녹음테이프를 풀기 시작했다.

    “내가 말이야, 일본 와세다 대학생 때 말이야.”

   외삼촌의 서두가 나오자마자, 우리는 “또 ‘각사이상! 각사이상!’하며 우동 사 주던 기생들 이야기요?”하며 와르르 웃었다. 그런데 그날은 겨울밤 거리를 누비며 우동 팔던 얘기가 아니라, 뜨거운 땡볕에서 ‘호리가따’ 하던 얘기였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호리가따’는 곡괭이로 땅을 파는 중노동이었다. 정수리를 내리쬐는 땡볕도 땡볕이려니와, 거의 돌로 채워진 땅을 곡괭이 한 자루로 파내려가는 것은 정말 고역중의 고역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유학생으로서는  돈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해야만 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곡괭이를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그러나,  연세가 더 많으신 분들도 하고 있는 일을 젊은 놈이 마다하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대지의 조각가’란 생각이 번쩍 들었다. “맞아! 나는 대지의 조각가야!” 그때부터 대지의 조각가란 자부심에 가슴이 뿌듯해지면서 한 곡괭이 한 곡괭이 내리칠 때마다 힘이 더 실렸다. 일도 남보다 더 빨리 끝나고 돈도 더 많이 벌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그에게 ‘호리가따'는 더 이상 고된 노동이 아니라 즐거운 놀이가 되었다. 같은 일을 하되 마음먹기에 따라서 그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말. 외삼촌은 그날 교과서적인 말을 되풀이 하진 않았지만, 우리는 그의 심중을 먼저 읽고 있었다. 장난기 많던 우리도 그날만은 웃지 않았다.
    대지의 조각가!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힘든 노동까지도 즐거운 놀이로 환원하는 자기 위안의 지혜. 그는 예의 낙천적인 성격과 아울러 끊임없이 연구하는 화공과 학자로서 대학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교수였다. 특허왕이라 불릴 정도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많은 발명품을 낸 그. 샤넬 #5와 본인이 만든 향수를 병만 바꾸어 아내로부터 샤넬 #5가 훨씬 낫다는 평을 받아낸 뒤 껄껄 웃던 그. 나에게 정신이 바로 박힌 제자라며 ‘곰보’ 제자를 신랑감으로 디밀어  난처하게 만들었던 그. 이제 그는 목숨만큼이나 사랑하던 학문과 가족을 두고 이 세상을 등지려한다. 어떡할거나.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흙이 묻는다던 김기림의 말이 새삼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슬픔도, 기쁨도, 사랑도, 미움도, 만남과 이별까지도 살아있는 이들의 청복인 것을. 그것이 비록 ‘흙’이란 이름으로 우리를 울린대도 땅을 밟고 할 수 있는 사랑은 지상에서만이 가능한 일이다.  
   지금 그는 병상에 누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절벽 같은 죽음과 싸우면서도 그는 남다른 자기 위안의 말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 얘기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주신 휴가 기간’이라 생각하고 방학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머잖은 날, 그는 한 평 대지에 누울 것이고 눈물 뿌리며 전송하던 우리도 곧 그 곁에 누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저마다 아름다운 별이 되어 먼저 간 이들과 반가이 만나리라. 뿐인가. 때로는 우리를 그리워하는 이들의 머리맡에 떠서 그들의 고단한 삶을 함께 염려하기도 하겠지. 다만, 우리는 그때까지 자연에의 순응을 마다 않는 나무의 덕을 배울 일이다. 비록 우리 모두 자기가 누울 땅을 파는 대지의 조각가가 될지라도.
   차가 멈추자 생각도 멎었다. 오늘따라 대지를 밟는 발바닥에 힘이 더해진다. 흙이 묻는데도 그게 무슨  대순가.
   
                                                                                                                                                                                          (199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