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 / 지희선

                    

   행복의 %는 욕망 분의 충족 곱하기 100이라고 한다. 결국 행복해지려면 욕망을 줄이든지 충족도를 높여가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물론, 욕망과 충족을 동시에 키워나간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민 생활의 어려움은 나이와 더불어 욕망을 자꾸만 낮추라고 가르쳐주었다. 그 말에 너무도 충실히 따랐던 탓일까.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처럼 높이 솟던 꿈은 어느 새 삭아 내리고 욕망도 하나 둘 버린 지 오래 되었다. 마치, 단풍잎들을 하나씩 버리며 겨울 초입에 들어서는 가을 나목과 같다고나 할까.
   이런 나에게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을 써 보라는 명제는 무언가 잊고 살았던 사실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다지 ‘절실하게’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것. 이 사실은 네게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이거야말로, 인생을 무의미하게 살아간다는 단적인 표현이 아니겠는가.
   물론,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손녀와 여행을 떠나 ‘추억 쌓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행복 여행이기에 열 장의 원고지에 풀어 쓸 일이 없을 것 같다. 그 대신, 궁리 중에 있지만, 꼭 한 번은 이루고 싶은 나의 꿈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십대를 위한 ‘미혼모의 집’을 운영하는 것. 이것은  어찌 보면 우연과 필연이 어우러져 짜낸 꿈이기도 하다.    
   어느 달밤에 있었던 일이다. 친구 집을 나오다가, 옆 공터에서 놀고 있는 앳된 소녀와 그림자를 밟으며 깔깔 거리고 노는 두 살 남짓한 사내아이를 보았다. 사내아이가 넘어지며 ‘엄마’를 부를 때에야 그 소녀가 아이 엄마라는 걸 알았다. 나는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짧은 미소를 보내곤 그 옆을 지나왔다. 그리고 나는 곧 그 히스패닉 모자를 잊었다.
   그 후, 몇 달 뒤에 나는 아이 엄마였던 ‘앳된 소녀’가 죽었다는 비보를 들었다. 파릇파릇하기만 하던 애 엄마가 죽다니, 정말 충격적이었다. 그 소녀는 둘째 아이가 자연유산 되면서 과다 출혈로 죽었다고 한다. “옆에 사람만 있었어도....... 아니, 그 부모가 좀 너그럽게 거두어주기만 했어도.......”하며 친구는 눈시울을 붉혔다. 십 대 소녀로 임신을 하자, 더 이상 자기 딸이 아니라며 부모들이 내쳐버렸단다. 친구는 결국 딸을 죽인 건 그 부모들이라며 원망하기도 했다.  
   관 속에 어린 엄마와 그녀의 팔뚝 길이만 한 갓난아기가 나란히 누워 있는 걸 보고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슬피 운 건 역시 소녀의 어머니였단다. 특히, 돈이 없어 인공 유산을 차일피일 미루어오다 당한 변이라는 말에 가슴을 쥐어뜯듯이 슬피 울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나도 ‘달밤과 소녀, 그리고 그 천진난만하게 놀던 두살박이 사내애’가 생각이 나서 덩달아 눈시울이 더워왔다.
   소녀의 실수와 완고한 부모들의 배척.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어린 것들이 어른들한테 등 떠밀려 험한 사회에 나와서 맨 몸으로 살아야 했던 현실. 끝내는 죽음과 맞바꾸어버린 상실의 아픔. 이 세상에 덩그러니 남은 두살박이 사내아이와 열아홉 살짜리 어린 아빠. 이 불행의 시작은 어디며 끝은 어디냐고 달밤이 물어와 나는 몇 날의 밤을 불면으로 보냈는지 모른다. ‘아, 나도 진작에 알았더라면 그날 밤 그렇게 무심히 지나쳐 오지 않았으련만.......’ 하는 아쉬움이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훤한 보름달을 볼 때마다 그 소녀가 생각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은퇴 후에는 ‘미혼모의 집’을 차려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돌보아주리라 결심하곤 한다. 학교를 끝내고 사회생활을 할 때 까지, 아니 아이들을 봐 줄 사람이 없으면 아이들까지도 봐주면서 그들의 성공을 지켜보고 싶다. 한 번의 실수가 생의 끝이 아니라 ‘불행한 과정’이었을 뿐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다. 진정한 사랑은 내 체면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이 일을 나는 내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배웠다. 어머니들에게도 애들을 내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리고 싶다. 가장 힘든 순간에 비빌 언덕은 ‘엄마의 등’밖에 더 있는가. 어느 고등학교에서는 탁아소를 운영해주어 어린 엄마들이 무사히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게 해 주고 있다고 한다. 불행한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어찌하랴. 자식은 부모의 ‘홀리 크로스’란 생각이 든다. 무겁지만, 꼭 ‘지고’ 가야할 '성스러운 십자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보다 나중에라도 꼭 해야 할 일을 위해 오늘도 나는 기도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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