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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채 서른도 되기 전의 일입니다.
멀쩡하던 아들 녀석이 갑자기 '급성 임파선 백혈병'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딱 한 달만에, 만 4년 20일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내 곁을 떠났습니다.
오랜 가뭄 끝에, 새벽부터 비가 오던 유월 초여름날이었습니다.
 
그 날 새벽, 아이는 목이 마른지 우유를 사 달라고 했습니다.
그즈음 남편은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를 살려보려고 양의, 한의를 찾아다니며 할 수 있는 민간요법까지 다 동원할 때였습니다.
우유나 야쿠르트가 안 좋다는 말을 어디서 듣고 왔는지, 나더러 절대 먹이지 말라고 당부한 뒤 출근을 했습니다.  
 
의사로부터 이미 보름 아니면 두 달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고온 터라 저는 사실 사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몸에 안 좋다고 하니까 '먹으면 안되잖아!'하는 암시로 아랫입술을 물며 고개를 흔들었죠. 
그때 아들녀석이 창밖을 보더니, "아,참! 엄마! 비가 와서 못 가겠제? 그럼 내일 사 줘!"하며 얼른 포기를 하더군요. 아픈 와중에도 얼마나 심성이 착한지. 저는 감동한 나머지,"그래,그래. 착하기도 하지. 내일 꼭 사 줄께."하고 엉덩이까지 두드려주며 철석같이 약속을 했지요.
 
그리고 그날 밤 10시 30분, 우유를 사달라던 그 '내일'이 오기 전에 아이는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먹고 싶던 우유도 못 마시고 목이 마른 채로, 55미리 고 작은 발로, 함께 가는 길손도 없이 홀로 떠나고 말았으니. '단장의 아픔'보다 오히려 넋이 나가버린 듯 저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장례식을 치룰 때까지 눈물조차 나오지 않더군요. 꿈인가, 현실인가, 소설인가. 모두가 비현실로 느껴졌습니다.
연기로 피어오르는 그 아이를 떠나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후로 꼬박 사흘을 물 한모금 먹지 못하고 드러 누워 있었지요.  
 
그제서야 녀석의 부재가, 상실의 아픔이 송곳처럼 가슴을 찌르기 시작했습니다. 
웃던 소리, 울던 소리, 찡그리던 표정 하나하나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가 되돌아오길 수십 번... 
눈물은 저 혼자 나오다가 말다가 하면서 계속 베갯잇을 적시고, 나는 뼈도 살도 다 녹아버린 투명인간이 되어 멍하니 천정만 바라보고 있었지요.
 
바로 그때!!! 
60대 초반 할아버지의 음성이 제 귓전을 때렸습니다.  
사랑이 가득한 음성으로, 하지만 딱해서 꾸짖는 듯한 음성으로 일성을 가했습니다.
 
   
    "그래, 너가 그렇게 사랑하는 애가 내 곁에 와 있다!
    이 애가 지금 너를 보고 슬퍼하고 있다!
    과연! (여기서 숨을 고르시는 듯 잠시 멈추시더니)
    이 애가 어떤 엄마가 되기를 바라겠느냐?
    우는 엄마? 아니다! 
    밥 잘 안 먹는 엄마? 아니다!!
    잠 잘 안 자는 엄마? 아니다!!!
    명랑한 엄마! 건강한 엄마!!  잠 잘 자는 엄마!!!" 
   그러고는 소리가 사라졌습니다. 멀건 대낮에 자고 있은 것도 아닌데,누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나는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나 방을 빙빙 돌았지요. 방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순간,'아, 맞어, 영혼불멸을 믿는 크리스챤이면서 나는 왜 그 애가 죽고 없다고 생각했지? 그 애가 지금 나를 보고 슬퍼하고 있다니! 그래선 안 되지.'

 

"그래 동휘야! 엄마가 잘 먹고 잠도 잘 잘께!"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던 내게 갑자기 힘이 용솟음쳤습니다. 방을 치우고, 음식을 지글자글 끓이며 부산하게 움직였습니다. 제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이, 하느님은 제 슬픔을 '깡그리'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야말로 1%도 남겨두지 않고 다 가져 갔습니다. 그때 나는 <완전하신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이웃 어른들의 인간적인 위로가 고맙기는 하지만, 큰 힘이 되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위로는 완전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통하여 <사랑의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사실, 그때 나는 불교인 남편과의 가정 평화를 위하여 6년째 교회(신교)를 가지 않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나를 기억해주시고 너무나 급하니까 '목소리'로 직접 찾아오셨던 거죠. 사랑이란 이렇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주고 일으켜 세워주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나의 하느님은 <예비하시는 하느님>이셨습니다.아들 녀석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저는 해묵은 수첩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6년 전, 길에서 우연히 만나 받아두었던 후배의 전화번호가 있었습니다. 유난히 저를 따랐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 후배에게 안부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후배는 죽었던 사람을 다시 만난듯 반가워하며 즉시 놀러오라고 떼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돌 지난 딸 아이 손을 잡고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며 그곳까지 갔습니다. 그곳이 바로 외국 신부님이 운영하시는 근로 청소년 센터라는 것을 가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새로운 교육 부장님을 두고 일주일 넘도록 기도 중에 있었다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전직 교사였던 나는 누구보다 아이들을 사랑했지만, 천주교 신자도 아닌 나를 끌다시피 원장 신부님께 데리고 갈 때는 정말 민망했습니다. 더우기 '하느님께서 보내주셨다'는 말까지 곁들일 때에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날부로, 근로청소년 180명의 선생님이자 정신적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잃은 아들 대신 180명의 아이들을 얻다니요! 그것도 6년 전, 길에서 우연히 받아 적어두었던 전화번호 하나가 끈이 되어 이런 귀한 인연을 맺다니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나를 위해  귀한 자리까지 예비해 두신 '플래너'였습니다. 

 

가난 때문에 책가방 대신 도시락을 들고 공장을 향해야 했던 우리 아이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고향의 동생들에게는 꼬박꼬박 학비를 부쳐주는 착한 아이들. 이 아이들에게 어찌 가슴 뜨거운 사랑이 일지 않겠습니까. 저는 제 세포 구석구석에 있는 사랑을 털어 아낌없이 주리라 다짐하며 하루하루를 정말 행복하게 보냈습니다.일년만에 아이들도 300명을 훌쩍 넘었고, 저마다 쑥쑥 성장해 갔습니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너무도 훌륭하신 신부님과 수녀님들을 만났기에, 미국에 이민을 오자마자 제 발로 걸어가 영세교리를 끝내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건강 상담을 맡아주셨던 벽안의 '문 요안나' 수녀님을 본받고자 본명도 '요안나'로 정했습니다.

훗날, 우리 근로청소년센터 학생 중에서 신부님 한 분, 수녀님 열 분이 나왔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인지요! 찬미가 절로 나왔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 중에 사별의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내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우십시오! 예수님 함께 울어 주십니다.그러나 너무 오래 울지는 마십시오. 위에서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 혹은 아내 자녀가 보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기쁘고 명랑하게 사십시다.

 

님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님은 떠났지만 나는 보내지 않았다'란 싯귀가 아닙니다. '고스트' 영화의 주인공처럼 바로 곁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함께 잠들고 함께 일어납니다. 우리 가는 발걸음 걸음마다 함께 동행합니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은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늘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