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인으로서 엄마와 함께 생활하는 일상을 적은 <꺾여진 길목에서>란 글을 쓴 지 꼭 일 년 만에 엄마에 관한 글을 다시 쓴다. 굳이 어머니 대신 제목에 엄마라는 호칭을 쓴 것은 엄마 앞에서 다시 어린 딸로 돌아간 친밀감 때문이다.
   허리 디스크 수술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간병인을 자처한 것이 작년 이맘때이다. 일 년 동안 나는 어머니와 울고 웃으며 신혼부부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간병인이라기보다 추억의 통로를 함께 걸어 나온 동반자로서 우리는 할 이야기가 많았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외로움으로 가득 찼던 노인 아파트 단칸방은 사랑의 훈기로 따스해졌다.
   처음엔 지팡이를 짚는 것조차 자존심 상해하시더니, 이제는 서둘러 챙길 정도로 지팡이와도 친숙해졌다. 채마밭에 재미를 붙이고, 보건센터에 나가셔서 ‘예쁜 할머니’로 귀여움을 독차지 하면서 어머니 인생에 제2의 행복기가 온 듯싶었다. 어머니가 정성껏 가꾸시는 양란도 흰꽃 자주꽃 색색별로 앞 다투어 피워주고 어항에서는 금붕어 세 마리가 활개치고 놀았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이랴. 신혼 같은 행복을 누리신 지 이제 겨우 일 년 남짓한데 위암 말기라니. 그것도 간까지 전이되어 수술조차 불가하다니. 보호자와 환자 앞에서 일기예보처럼 담담하게 얘기해주는 의사의 선고에 우리도 ‘아, 오늘 날씨가 그렇구나.’하듯 표정 없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막상 병원 문을 나서자 멍-하니 진공 상태가 되면서 발걸음이 풀렸다. 세상의 봄날은 어머니로부터 사라졌다. 화사한 남가주의 봄날이 오히려 잔인하게 다가왔다. 자기의 향방을 향해 신나게 달리는 차량조차 참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식다동하고 그토록 운동도 열심히 해 오신 어머니, 일일일선을 모토로 매사에 긍정적이고 명랑쾌활하게 사시는 어머니. 왜? 왜? 왜? 수없는 물음표가 어둔 밤하늘에 별이 찍히듯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찍혔다. 잡고 걷는 두 손에 힘을 줄 뿐, 나도 어머니도 말문을 잃었다.
   몇 걸음 발을 옮기자 몸의 이동과 함께 생각에도 변화가 왔다. ‘아, 참! 명색이 내가 간병인이지.’하는 생각이 번쩍 들면서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엄마, 인명은 재천이라고 하늘의 뜻에 맡기고 우리는 숙제 잘 해오는 모범생처럼 의사 말씀 잘 듣고 식이요법하면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잖아요.”하며 위로해드렸다. ‘숙제 잘 해오는 모범생’으로 그날그날 열심히 살자는 원칙이 정해지자 다시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의사의 처방과 식이요법, 신앙적 무장으로 심리적 안정을 되찾는 것 세 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어머닌 암에 좋다는 것은 다 먹어보고 싶은 눈치였다. 특히 생생한 체험기로 연일 텔레비전이다 신문이다 떠드는 H 제품에 관심이 많았다. 전화를 해보니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더욱이 그 약(그들은 다시마를 주원료로 한 ‘건강제품’이라했다)은 점차 줄여갈 뿐 평생 먹어줘야 한다고 했다. 나도 효과야 어쨌든, 한번만이라도 드시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반대했다. 마음이 약해져 경제적 개념이 희박해진 암환자들을 악용한 상술인데다가 효용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그만큼 좋은 제품이고 암환자들의 생명을 구해주는데 보람을 느낀다면 한 달에 몇 천불씩 받을 게 아니라 부담없이 꾸준히 먹을 수 있도록 가격조정을 해줘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우리는 영지버섯과 상황버섯...(계속)  

* 잠시 집에 들렸다가 정리 차원에서 쓰던 글인데 병원 갈 시간이 임박해서 미처 완성하지 못했더랬습니다.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어머닌 살아계셨는데 결국 이틀 뒤에 어머닌운명하셨네요. 한동안 이 글을 완성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유품을 정리하는 중입니다. 하느님도 받아들이시고, 고생도 덜 하셨고,한 달 동안 모든 숙제를 푸시고 가셨기에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인간적인 슬픔 때문에 울컥울컥하네요. 어머니 없이 처음으로 맞는 '어머니 날'을 생각하니 슬픔이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앉네요.  (05-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