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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거의 한 달 만이다. 손녀 학군 때문에 엘 에이 카운티에서 오렌지 카운티로 이사를 한 뒤로는 만나보기 힘들어졌다. 그러다 오늘 모처럼 시간을 내어 만나니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손녀도 안 보는 사이에 부쩍 의젓해진 듯하다.

   우리는 음식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말끝에 “나는 선 셋이고, 너는 선 라이즈야! 이제까지 그리해 왔듯이 앞으로도 엄마는 너를 받쳐주는 꽃받침이 될 거야!”라고 말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내 나름대로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지만, 이제 육십 줄에 든 나로서는 나 자신보다는 더욱더 딸아이를 위해서 헌신하고 싶었다. 그것만이 내 남은 삶에 할 일이고 나의 최대 행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손자 손녀 보는 일에 손사래를 치는 ‘신식할머니’보다는 ‘구식 할머니’가 되기를 진작에 자청한 사람이다.

   딸은 미국 굴지의 패션 회사에서 전문직 여성으로 성장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나와 달라서 독립심이 강하고, 야망도 큰 아이다. 마음만 먹으면 여기서 공부했겠다, 젊겠다, 얼마든지 꿈을 키우며 거침없이 나갈 수 있는 환경이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뛰어나고 무엇이든지 만들기를 좋아해서 언제나 ‘핸드 메이드’ 선물을 하던 아이라 제 갈 길을 잘 선택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우리는 평소에도 대화를 많이 나누며 공감대를 형성해 오고 있는 편이다. 오늘도 즐거운 마음으로 많은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끝내고 돌아왔다.

   다음 날, 자기 블로그에 엄마를 위해 글을 하나 올려놓았으니 읽어보라며 전화가 왔다. 나를 위해서 쓴 글이라니? 좀 의아했지만 흥미를 느끼고 얼른 들어가 보았다. When I was로 시작되는 글은 기억의 저편으로 나를 돌려세우며 어느새 눈가를 촉촉이 적셔왔다.

   나이 서른 둘에 세 살짜리 딸아이 손을 잡고 단둘이 태평양을 건너왔다.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갖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식구 네 명이 갑자기 두 명으로 줄어드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나 혼자만 겪는 아픔이 아니라 자위하면서 마음을 재무장했었다. 싱글 엄마로 살아온 지 십칠 년. 내 살아온 날들은 계절로 치면 겨울이라기보다 여름에 가까웠다. 그리고 내 딸은 그 뜨거운 뙤약볕을 걷는 나에게 ‘플라타너스’ 같은 존재였다. 김현승의 시처럼 '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그 애는 나의 동행자가 되어 주었고 그늘이 되어 주었다. 그 외롭고도 먼 길을 그 애가 함께해 주지 않았더라면 혼자서 헤쳐 나오기 힘들었으리라.

   토막토막 나이별로 끊어서 쓴 딸의 글은 이민을 온 세 살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네 살 때 글은 내가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섧게 운 날을 기억하며 쓴 것이었다. 그날은 나도 선명히 기억하는 날이다.

   일요일 아침이었다. 형부랑 앞으로 살아갈 문제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동안 참아왔던 설움이 왈칵 쏟아졌다. 모든 게 섭섭하고 서러웠다. 나를 사랑하는 엄마가 계시고, 내가 못 견뎌 하는 추위가 없는 곳이라 마냥 좋기만 할 줄 알았는데.

   나는 아이 손을 잡고 그대로 뛰쳐나와 라브레아 공원으로 차를 몰았다. 어디론가 가서 실컷 울고 싶었다.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동네 제일 가까이 있던 라브레아 공원으로 핸들을 꺾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 나는 걱정스레 엄마를 쳐다보고 있는 딸아이의 눈망울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저 순진한 아이의 눈망울에 이토록 섧게 우는 엄마의 모습을 각인시켜주다니. 나는 얼른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짐짓 공원으로 새벽 산책이라도 가는 듯 즐거운 기분으로 딸애의 기분을 맞추어 주었다. 우리는 공원의 야트막한 언덕에 나란히 앉았다.

   마침 여기저기 토끼풀이 나 있었다. 어릴 때 풀 반지를 만들며 놀던 생각이 났다. 나는 어릴 때 이야기를 해 주며 토끼풀을 뜯어 반지를 만들어주고 줄기를 좀 길게 끊어 팔찌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팬티가 보여도 창피한 줄 모르고 언덕 아래로 막 구르며 즐겁게 놀았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때였다. 이때까지 계속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내 눈치만 보던 아이가 활짝 웃으며 “엄마! 나도 한 번 굴러볼까? 엄마 웃게!” 하며 일어섰다. 딸아이는 언덕을 뒹굴며 철조망까지 굴러 내려갔다. 그런 뒤에는 힘겹게 걸어 올라와 다시 뒹굴뒹굴 굴러 내려갔다. 됐다고 해도 자꾸만 자꾸만 굴렀다. 그 모습이 눈물겹도록 애처로웠다.

   어느새 해가 돋고 아이의 이마에는 땀이 송송 맺혔다. 내 눈에는 다시 눈물이 솟구쳤다. 저 어린 것이 무엇을 안다고 이리도 엄마 마음을 돌려주려고 애쓰나, 싶어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미안하고 불쌍했다. 나에 대한 그때의 아이 마음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하리라. 훗날 그 애가 사춘기를 심하게 겪으며 흔들릴 때도 나는 깊은 사랑으로 감내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나를 기쁘게 해주려던 그 마음 그대로 나는 되갚아 주고 싶었다. 이제는 모두가 지나간 일, 그리고 함께 했던 우리의 시간만이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내 딸 동미,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딸. 내 염원을 담아 지어준 이름 그대로 몸도 마음도 동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되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빈다. 딸아, 너로 인해 다시 한 번 아름다운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해 주어서 고맙다. (09-15-13)

I WAS.. . / 박동미

I was 3 when my mom decided our future... planning a life long journey for the both of us in a far away land named America. Hand in hand, side by side. Just the two of us. Like two peas in a pod snuggled together warm and inseparable. She meant the world to me.

 

 I was 4 when I first saw her struggle. A sunny breezy day in La Brea Tar Pits just the two of us. Hand in hand,  side by side on the edge of concrete above the grassy hill. Some days she would make me beautiful bracelets and rings out of 2 or 3 flowers.  We would first pick the strongest flowers  from the grass. She would slit a hole through all the stems, connect them and wrap them around my finger or wrist. I would feel like a queen embracing the delicate jewels I now owned. However on this day, I looked up at her and saw tears streaming down as she let out a sigh wondering how we would ever climb up the hill of life. I got up and rolled down the grassy hill of present to make her laugh.

 

I was 6 when I first learned courage. We were hand in hand, side  by side laying in bed, drifting in a dreamless slumber. She got up and ran outside. I chased her 2 blocks down. She was on her knees hugging a 4 year old boy  comforting and shielding his eye. His Father was beating his mother  on the lawn. She was protecting the boy, but I wanted to protect her. I found the courage to shield her.

 

 I was 12 when I wanted Independence. No longer wishing to be 2 peas in a pod. No longer wanting to be hand in hand, side by side. I wanted my hands both on MY sides. To give when I wanted to give. To take when I wanted to take. I wanted a voice. I was me. She was she.  She tried to keep me warm. She warned me of the world. She was sad. I was mad. She was alone. I was alone. She cried.

 

 I was 17 when I learned of love. I was horrible, uncontrollable. She was  love. She held me, embraced me, comforted me. No explanations needed and only words that whisper to a soul that is the same. She held my hand as I slept. She watched me quietly and carefully. She loves me. I needed her love. I am sorry.

 

I was 21 when I grew up. She's in the car waving at me with one hand and the other hand is holding up my love. I walk to them knowing that we are now 3 peas in a pod. My dreams become them and they become my goal. I will bring the dream to them so that we can be hand in hand, side by side and now 3 peas in a pod.

 

P.S

The above is a little dedication that I wrote for my Mother.  I am now 31 and she is now 60. We share conversations over dinner discussing anything from yesterdays activities, books,  politics in China, religion, love, etc.... There is no limit to her wealth of knowledge nor her desire  to give of herself unconditionally to the people and children in the world. She is my hero, my best friend, my every thing. I get sad at times thinking that her life is almost over or in her words, "My sun is setting and yours is rising" that constantly ring in my head.  I wish she knew how important and how much of an impact she has made in my life and in the life of everyone she has ever touched. I love you Umma (Mom). - Dong-Mi ( The name my mother has given me with all of her hopes and dreams built into each character which hold the meaning "The most beautiful in the Eas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