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뛰는 마라톤, 즐거운 인생’

    우리 Runners Club의 구호다. Runners Club은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새벽 여섯 시, 그리피스 공원에 모여 함께 달리는 마라톤 클럽이다. 새벽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고 싶던 차에, 신문에 난 마라톤 교실 기사를 보게 되었다. 따로 연습할 시간이 없으니, 이왕이면 일주일에 두 번 모이는 팀으로 가자고 고른 것이 LA Runners Club이다.

    역시 새벽을 달리는 사람들은 부지런할 뿐만 아니라 생각도 건전했다. 내가 상위 고령층에 들긴 하지만 최고령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다. 올 4월 초에 끝난 14기 마라톤 교실은 명코치로 정평 나 있는 KART의 피터 김 코치였다. 2분 뛰고 1분 걷고... 3분 뛰고 1분 걷고... 5분 뛰고 1분 걷고... 야금야금, 살금살금 우표값 올리듯 1분씩 올라가는데 그것도 숨이 차올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1분 더 뛰는 게 그렇게 힘들 줄이야!

    그런데 달리기 교실이 끝나자마자, 그 명코치도 사라지고 1분씩 걷던 시간마저 없어졌다. 스트레칭 끝내고는 조금 걷더니 냅다 뛰어 나간다. 서서히 뛴다고는 하나 나한테는 그것도 ‘냅다’로 보인다. 보폭도 짧고 하나도 빠르게 뛰지 않는 것 같은데도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기본이 6마일이고 어떤 사람은 12마일 뛴단다. 마라톤 준비하는 사람은 언덕 훈련에 여기저기 빨치산처럼 산 속에서 출몰한다. ‘아니, 이거 뭐야? 인정사정 없는 사람 같으니라구, 홀로서기도 좋지만 조금은 더 도와주어야 하는 거 아냐?’ 욕이면 어떻고 투정이면 어떠랴. 속으로 혼자 하는 말인 것을. 버려진 자식처럼 뒤쳐진 나는 뛰다가 걷다가 하며 겨우 6마일을 돌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오니, 이건 또 웬 잭팟? 수박, 바나나에 갓 삶아낸 달걀과 컵라면까지 푸짐한 간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받아먹고 성 내는 놈 없다더니, 힘든 것은 일시에 사라지고 툴툴댔던 마음은 감사함으로 바뀐다. ‘그래, 결과는 몸이 말을 해 준다니, 까짓것 한 번 해 보는 거야!’ 시원한 수박으로 더위를 달래고 컵라면으로 배를 불리고 나니 없던 호기까지 생겼다. 잘 뛰든 못 뛰든 결과는 몸이 말을 해준다니 가급적이면 빠지지나 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신발끈을 조여맸다.

    초보라 그런가. 뛰다 보면 온갖 잡생각이 다 든다. ‘김코치가 그랬지. 너무 힘들면 걸으세요, 무리하지 마세요.’ ‘맞아, 나는 멥새야. 절대로 황새를 따라가려 하면 안돼. 욕심은 금물이야.’ ‘소크라테스가 진작 말했지? 너 자신을 알라고. 그래, 4대 성인의 말을 안 들으면 누구 말을 들어?’ ‘아니, 이 나이에 이렇게 뛰다가 길에서 객사하는 거 아냐?’ ‘아니지, 저 홍사일님도 일흔 여섯이라는데 그렇게 뛰고도 펄펄하잖아?’ ‘십 년 정도 됐다는데 나도 계속 뛰어 봐? 에이, 심장도 약한 내가 어떻게 십 년을 더 뛰어...’ ‘아니지, 러너스 클럽에 왔으니, 일단 하프하고 풀 한 번만 뛰고 끝내지 뭐. 내가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맨날 뛰어다녀...’ ‘아, 참! 힘들면 칙칙폭폭 하며 호흡조절 하라고 했지?’ “칙. 칙. 폭. 폭.” ‘아이구, 내가 갖은 짓을 다 하는 구나.... 그래도 도움은 좀 되네?’ ‘가만 있자, 차라리 문교부 장관 노래를 부를까?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학교종이 땡땡 친다.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문 앞에서 기다리신다. 이거 괜찮네? 한 마디 한 마디 첫 음마다 왼발을 짚으면 되겠네. 박자도 네 박자라 똑 떨어지네...’ ‘그러나 저러나, 어쩌면 이리도 잡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 선배들도 이런 잡생각을 하며 뛸까, 아니면 무념무상으로 뛸까?’ 생각은 시이소오를 타다가 그네를 타고 훨훨 하늘을 나른다.

   온갖 잡생각을 하며 뛰다보니 어느 새 6개월이 흘러갔다.

결과는 몸이 말을 해 준다더니 이 말은 금언이다. 6개월이 지난 지금, 30분 정도 소요되는 3마일 까지는 뛸 수 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사랑의 마라톤에서 경아님의 독려로 3마일 거리인 5K를 걷지 않고 끝냈다. 그 이후로 자신감이 생겨, 3마일은 가급적 안 걷고 뛰고 있는데 그것도 컨디션에 차이가 있다. 어떤 땐 수월하고, 어떤 땐 숨이 턱에 찬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내년에 있을 헌팅톤 마라톤 대회에 하프(13마일)를 신청했다. 아직, 6마일도 뛰지 못하는데 그 두 배도 더 되는 거리를 뛰어내야 하니 걱정이 태산이다. 하지만, 남은 4개월 동안 연습을 열심히 할 수밖에. 마라톤 역시 왕도가 없다.

    오늘은 LA에서 Los Feliz까지 뛰어 왔다. 중간 반칙을 감안하더라도 연습장까지 1.5마일을 더 달려왔으니 총 7.5마일을 뛴 셈이다. 뛰다가 걷다가 해도 아직은 6마일이 나의 한계인데 한계 초과다. 정말 이게 살려고 하는 일인지 죽을려고 하는 일인지 헷갈리던 그 순간, 쨔~안하고 우리 Runners Club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하프 마라톤을 완주하고 finish 라인 테이프를 끊는 듯 반가웠다. 그래서 인증샷으로 찰칵! 한 장 남겼다. 어제는 비 핑계로 쉬었는데, 그 보충이라도 한 듯싶어 뿌듯하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친다. 사람은? 그렇다. 언젠가는 걸을 수 없는 날도 온다. 뛸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마라톤도 인생과 같다. 열심히 뛰어 왔으니, 앞으로도 열심히 뛸 일만 남았다. 내 길이 끝나는 그날까지. (11-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