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5일 일요일과 프레지던츠 데이인 16일 연휴를 맞아 푹 쉬어보려 했는데 오히려 일만 실컷 하고 왔다.   남편 말씀하시길, 배추가 싸다며 김치를 담그잔다. 작년에도 배추 세일이라며 덜렁 한 박스 사 들여오는 바람에 김치 냉장고까지 샀다. 은퇴한 남편이 안살림을 살다보니, 부엌에 대한 주권을 뺏긴 지 오래다. "내가 담으면 맛이 없는데... "하고 슬쩍 뺐는데도 익으면 다 맛있다며 마켓 쪽으로 차를 돌렸다.
  요즈음은 물가가 올라, 이것저것 주섬주섬 담다보면 금방 $100이 찬다. 오늘은 양념 재료까지 샀더니 $150이 훌쩍 넘어갔다. 두 명밖에 없는 식구에 그나마 주말부부로 살고 있으니, 혼자나 다름 없어도 들 건 다 든다.
  LA에서 우리 집이 있는 리틀락까진 장장 한 시간 반 거리. 부부가 고손고손 이야기도 하면서 드라이브 삼아 갈 만한 거린데도, 할 말도 없고 들을 말도 없는지 '고요한 침묵' 속에 집에 도착했다. 차소리를 듣고, 강아지들이 우루루 쫓아나와 꼬리가 떨어져라 흔든다. "아이고, 귀여운 것들! 죽을 때까지 우리 같이 가자아~"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남편한테도 못한 사랑의 맹세가 강아지 앞에서는 술술 나온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주변엔 봄의 기운이 완연하다. 제일 먼저 반겨주는 건 아몬드꽃이다. 하얀 아몬드꽃이 곁에 있는 푸른 솔잎과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한줄기 바람이 후루룩 스쳐가자, 꽃잎이 낱낱이 흩어져 꽃비처럼 내린다.
  이사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지붕을 넘어온 아몬드 꽃잎을 몰라보고 애꿎은 강아지만 혼냈다. 처음엔, 갖고 놀던 곰인형 솜을 다 뜯어 놓은 줄 알았다. "이 녀석들!"하며 혼내주려 허리를 굽혀보니, 솜이 아니라 하늘하늘한 꽃잎이었다. 아니, 어디서 벗꽃이?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꽃잎의 출처를 찾아 종종걸음을 쳤다.
  아, 그런데 드라이브 웨이 소나무 곁에 솜털구름처럼 꽃잎 뭉치가 뭉게뭉게 피어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건 벗꽃이 아니라, 아몬드꽃이었다. 마치, 봄날의 벗꽃같이 허드러지게 핀 아몬드꽃과의 첫만남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 이후, 아몬드꽃은 봄을 기다리는 내 마음을 더 조바심치게 했다. 농장으로 들어서니, 매실꽃은 벌써 지기 시작하고, 복숭아꽃은 몽글몽글 꽃봉오리를 달고 있다. 체리는 몸 전체 붉은 피톨이 도는지 붉으데데하게 달아올라 열매 맺을 채비를 한다. 포도가 의외로 잘 된다며 포도나무를 몇 십 그루나 더 심어 놓았다.
  왼쪽 닭장 쪽으로 다가가니, 공작들은 후루루 날아 집 속으로 숨어버리고 닭들은 떼지어 내 주변에 모여 든다. 그러다, 모이는 주지 않고 사진만 찍어대니 다시 제 위치로 흩어져 버린다. 어떤 놈들은 철망 앞에서 바깥 구경을 하고, 숫놈들은 목을 꺾어 "꼬끼오!"하고 한낮의 적막을 가른다. 무슨 부탁을, 언제 했는지 오늘따라 내 귀에는 "꼭이요!"하고 다짐을 받는 볼멘 소리로 들린다. 다음에는 사진기 대신, 모이를 갖고 오라는 부탁 말씀인지 마음이 좀 뜨끔하긴 하다.
  공작과 닭을 함께 키우는 것은, 공작부인이 우아하게 다닐 뿐, 모성이 약해 가끔 닭이 알을 품어주기 때문이란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닭이 종종 공작알을 품어주는 것을 보았다. 달걀보다는 훨씬 큰 데도 품어주는 게 이상했다. 머리가 나쁜 건지, 니 새끼 내 새끼 가리지 않고 품어주는 그 아량이 착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자고로, 암공작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는 생각을 고쳐 먹어야할 것같다.
  꽥꽥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워 돌아보니, 거위와 오리다. 일전에는 염소집 옆에 있었는데, 언제 닭장 곁으로 옮겨 놓았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염소 구경을 하던 중, 거위 주둥이에 정강이뼈를 호되게 찍혔다. 나는 아파 죽겠는데, 남편은 밥을 안 주니까 그렇지 하며 껄껄댔다. 하긴, 와이프니까 그렇게 웃었겠지. 옆집 아줌마 같으면 얼른 약통을 들고 왔으리라. 나도 헛웃음을 웃고 말았다. 거위놈한테 한 번 찍힌 이후로는 귀여운 오리까지 '바라만 보는 먼 그대'가 되었다.
  한 가지 섭섭한 건, 염소를 처분해버린 일이다. "매헤에! 매헤에!"하고 울 때마다 시골 농장 냄새가 물씬했는데 아쉽다. 그것도 알팔파 값이 너무 올라 먹이를 감당할 수 없어 팔았다니 정말 미안하다. 나하고 의논이라도 하지, 하는 마음 누를 길 없다. 짐승도 부자 주인을 만나야 털도 번지르하고 먹기도 잘 먹는다. 염소가 없는 빈 집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배추를 절이는 동안에 농장을 한 바퀴 돌고나니, 어느 새 해가 기울었다. 아침 열 시에 시작한 김치 담그기는 뒷정리까지 합해서 저녁  여덟 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이번에는 더 맛있게 담아보자고 평소에는 안 넣던 갓이야, 미나리야, 배야, 생새우까지 넣었다. '최고의 요리'에 나오는 김치박사 박경신의 비법을 유튜브로 전수받아 담았는데 맛이 어떨지 모르겠다.
  아무려나. 따스한 햇살을 등에 받으며 옛날 어머니가 하던 대로, 수돗가에 퍼질고 앉아 김치를 담근 한나절. 오붓한 한 때를 보낸 것같아 흐뭇하다. 아몬드꽃이 바람에 흩날려 꽃비처럼 나리고, 떨어진 꽃잎은 솔잎 그늘 아래서 모처럼의 휴식을 취한다. 아마도 내년의 봄을 기약하는 꽃의 휴식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