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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음이 짙어갈수록 깊음을 더해가는 플라타너스는 여름날에 더욱 사랑받는 나무다. 뜨거운 여름밤이면, 사람들은 무성한 잎들의 초대장을 받기나 한 듯 플라타너스 그늘 밑에 모여 동화 같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하지만, 나는 장마철이 시작되는 유월의 플라타너스를 더 사랑했다. 넓은 잎으로 후드득후드득 비를 떨구며 지리한 장마를 잊게 해주던 유월의 플라타너스는 파초 잎 못지않게 운치가 있었다.    
    이런 날엔, 김현승님의 시 ‘플라타너스’도 한 몫 거들어 더욱 감상에 젖게 했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하고 잔뜩 감정을 넣어 읊다 보면 나도 모르게 한 사람이 사무치게 그리워지곤 했다. 그리고 어느새 내 마음은 그와 함께 비를 맞으며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을 걷고 있는 것이었다. 사랑하면서도 고독했고, 만남을 원하면서도 이별을 강권했던 그 시절. 나의 유월은 알 수 없는 쓸쓸함과 비애미에 젖어 플라타너스와 함께 깊어갔다. 하지만 플라타너스에 대한 이 젊은 날의 낭만적 고독이 상실의 고독으로 바뀌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누가 알았으랴.  생살 찢기는 아픔이 장마비 되어 유월의 플라타너스 위에 흩뿌릴 줄이야. 나를 두고 훌쩍 떠나가버린 아들 녀석. 작은 그림자를 말아쥐며 홀로 떠나간 그 녀석에게 나는 수천 번도 더 묻고 싶었다.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고. 
    

   81년, 유월하고도 12일.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리던 날 아침이었다. 그때 방안에는 네 살배기 아들 녀석이 급성 임파선 백혈병으로 한 달 째 누워있었다. 이날따라 일찍 눈을 뜬 녀석이 우유를 사 달라며 칭얼댔다. 골수이식이나 피갈이 방법 밖에 없다는 의사의 말을 뒤로 하고 나온 터라, 민간요법에 희망을 걸며 용하다는 한의사 말을 신탁처럼 받아 모실 때였다.
   우유를 사달라는 아이에게 곱게 눈을 흘겼다. 아빠에게 혼난다는 암시였다. 이심전심. 이미 이틀 전에 쓴 다슬기 즙을 다 토해버려 아빠에게 뺨을 한 차례 맞은 터였다. “자식아, 좀 먹지. 아빠가 냇가에서 잡아 돌절구에다 빻은 건데......” 울먹이는 남편과 그 모습을 힘없이 바라보는 아이의 눈망울을 나는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물마저 토해버리는 아이에게 쓴 다슬기 즙을 먹이는 건 무리였다.

   그러나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 보고 싶다는 젊은 아비의 부성을 난들 어찌 막으랴. 나는 남편이 없는 틈을 타 종종 ‘반칙’을 했다. 보름 아니면 두 달이라 하지 않았는가. 되도록이면, 저 좋아하는 것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우유는 진짜 안 좋다고 하니 어쩌랴. 의학이나 과학적 근거는 이미 우리의 상식선을 벗어나 있었다. 우리는 점점 한의사와 이웃의 `카더라' 통신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살아난 사람이 있다는 말보다 더 희망적인 말이 있을까. 우리는 하루하루 희망에 속아 살면서도 노력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엄마의 눈 흘김에  두말없이 조용해진 아이. 아이치고도 녀석은 너무나 착했다. '꽃밭에서'란 동요를 함께 부르다, `새끼 줄 따라'에 이르자 "엄마, 새끼는 욕이잖아?" 하며 큰 죄나 지은 듯 깜짝 놀라 노래를 멈추던 아이. "으응, 이 새끼는 욕 새끼가 아니고 시골에서 농부가..." 엄마의 설명에 그때사 안심했다는 듯 환히 웃으며 노래를 다시 부르던 아이. 뿐인가. 녀석은, 쥐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방으로 뛰쳐 들어온 엄마를 위해 일 년 넘도록 쥐를 쫓아주었다. 장난감 긴 칼로 부엌바닥을 두드리며  "쥐야, 나오너라, 나오너라."하며 쥐를 쫓은 뒤 "엄마, 이제 다 갔어. 나와."하며 방문을 빼꼼히 열어주던 아이. 비록 세 살배기 꼬마였지만 그럴 때면 내겐 다시없이 미더운 아들이었다. 하얀 아이 얼굴 위로 소소한 추억들이 앞다투어 나선다. 잠시 눈시울이 더워와,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다. 사랑에 미안함을 더 많이 얹은 손길이었다.

   그때, 창문을 보고 있던 녀석이 갑자기 생각이라도 난 듯, 명랑한 소리로 다시 부탁했다. “아, 참! 엄마, 밖에 비가 와서 못가겠제? 그럼 내일 사줘, 응?” 다짐까지 하며 또 한 번 저와 나만의 비밀을 만들려는 녀석. 나도 둘만의 비밀에 부치기로 하고, 내일 꼭 사 주겠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날 밤  '내일'이 오기 전에 녀석은 만 사년 이십일의 생을 마감하고 내 곁을 떠났다. 먹고 싶던 우유도 못 먹고, 55미리 신발 두 쪽을 벗어둔 채 그렇게 떠나가고 말았다. 함께 나누었던 짧은 미소, 그리고 우리 둘만이 아는 은밀한 약속. 그것이 그 애와 마지막 나눈 작별 인사였다. 한 목숨이 지는 그 시각에도 창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플라타너스 잎은 비를 털어내고 있었다. 그 날 이후, 유월만 오면 플라타너스보다 먼저 내 가슴이 장마비에 젖어들어 무언가 후드득후드득 털어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너무나 뜻밖의 장소에서 플라타너스와 해후했다. 문학 세미나 참석차, 서울에 들렀다가 친구 집으로 향하던 길목에서였다. “어머! 플라타너스! 얘, 차 세워!” 갑자기 소리치는 나를 보고 친구는 깜짝 놀라 차를 세웠다. 길 양옆으로 병렬식을 하듯, 죽 이어져 있는 플라타너스 가로수는 너무나 멋지고 아름다웠다. 가로수 사이로 달려간 나는 나무 둥치도 안아 보고, 그늘 속에 앉아보기도 하고, 이파리도 뒤적여 보며 신기해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를 잃고 미국으로 떠나가 산 지도 어느새 이십여 년. 플라타너스를 못 본 지도 그와 햇수를 같이 하고 있었다. 이십여 년 만에 보는 고국의 플라타너스. 마치 죽은 아이가 환생이라도 해온 듯 반갑기 그지없었다. 한줄기 소나기라도 뿌려주었으면 '그 날'의 완벽한 재현이 되었을 터인데 그게 조금 아쉬웠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서도 공통점을 찾고 싶어 하나 보다. 시인의 플라타너스처럼 나의 플라타너스도 먼 길을 오며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함께 걸어온 사랑의 동반자였다. 푸른 잎 너울대며 연서를 보내오는 나의 플라타너스. 죽은 듯이 서 있는 겨울나무도 봄을 키워왔을 뿐, 죽은 게 아니라고 수런댄다. 녀석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내일'이 '오늘'이란 이름으로 무수한 일력을 넘기며 지나가는 동안 나 또한 얼마나 많은 연서를 보내었던가. ‘길이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이었노라고.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로 널 만나러 갈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모처럼 온 모국 나들이를 내 아이도 반겨 마중 나왔음인가. 마치, 하늘나라에서 부쳐온 초록엽서인 양, 나는 플라타너스를 읽고 또 읽으며 떠날 줄 몰랐다.
   장마비 오지 않는 미국의 유월. 사람들은 현란한 장미꽃에 넋을 잃고 있지만, 내 마음은 장마비에 젖은 유월의 플라타너스를 그린다. 거기엔 내 젊음의 달콤한 고독이 어려 있고, 수런대며 들려주는 슬픈 동화가 있고, 영원한 네 살배기 내 아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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