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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도 들도 연초록 편지를 띄우기 위해 생각을 모으는 시간. 어린 날, 내가 곧잘 했던 버릇처럼 창가에 턱을 괴고 오는 봄을 맞는다. 코끝을 스치는 봄바람이 참 향긋하다. 긴 겨울을 이겨내고 새 생명을 틔운 쟈카란타 잎들이 퍽이나 정겹다. 하지만, 진초록 잎이 되기에는 아직도 먼 시간이다. 우리도 푸른 봄을 맞기 위해선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할까 보다.    
    ‘긴 시간? 언제까지?’ 슬며시 생각에 무게가 더해진다.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바람에 연두 빛 잎들이 하르르 떨며 저들끼리 수런댄다. 무슨 일인가 싶어 좌우를 살피는 작은 새의 앙증스런 모습에 내 마음도 다시 가벼워진다.
   봄은 무슨 색깔일까. 연두 빛일까, 노랑 빛일까. 아니면 두 색을 적절히 배합한 얄푸른 빛일까. 죽은 듯 서 있던 검은 가지들이 연초록 잎을 틔워 연서를 보내오고, 잔디밭 여기저기엔 흩뿌린 듯 노란 민들레가 눈길을 붙든다. 지금쯤 고국의 겨울 들판에도 푸른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날 테고 시골집 담장엔 노란 개나리가 한창이겠다.
   봄은 정녕 신의 수채화다. 그것도 연두와 노랑을 즐겨 쓰는 밝은 수채화다. 겨울 내내 짙은 수묵화만 그려온 탓에 잠시 기분 전환을 해보고 싶었던 걸까. 이렇듯 밝은 빛을 띠고 찾아오는 봄날엔 내 마음도 파스텔 톤처럼 풀린다. 이런 날엔, 사소한 오해로 헤어진 친구에게도 손 내밀고 싶고 멀어진 님에게도 미안했다는 말 전하고 싶어진다. 살쾡이마저 유순해지는 봄날, 사순과 부활이 하필 이 봄에 들어있는 것도 어쩌면 신의 섭리인지도 모른다. 얼었던 땅이 풀리고, 메마른 가지에 움이 트고, 움추렸던 새들이 날개를 펴서 파닥이는 봄은 마음에도 꽃물을 들이는 계절인가 보다.
   산도 가로수도 온통 검은 수묵화를 그리고 선 겨울을 지나, 고흐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주황의 여름 사이 연초록으로 찾아드는 봄이 참 고맙다. 가지 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람마저도 연두 빛이다. 그래서 조지훈 시인은 봄이 오는 소리를 이렇게 노래했나 보다.
   ‘햇살 바른 곳에 눈을 꼬옥 감고 서 있으면/귀가 환하게 열려온다/지금 마악 눈덮인 앞산을 넘어/밭고랑으로 개울가으로/퍼져가는 바람소리는 연두 빛이다’
   이토록 아름답고 밝은 봄날에 그리움은 왜 이다지도 지분대는 것일까. 봄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봄앓이는 더욱 심해진다. 내가 놀던  보랏빛 야산엔 방울뱀을 보고 놀라 내던지고 온 쑥바구니가 뒹굴고, 함께 참꽃(진달래꽃)을 따먹던 친구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어릴 적 친구가 생각나면 난 곧잘 동요를 부르며 마음을 달래곤 한다. 열 곡, 스무 곡 부르고 또 부른다.
   “겨우내 눈 속에서 기다리던 봄/ 가자가자 진달래 꽃 맞이 가자”
   “다람쥐야 다람쥐야 재주나 한번 넘으렴/팔닥 팔닥 팔닥 날도 정말 좋구나”
   처음엔 빠른 템포의 노래를 신이 나서 부른다. 그러나 이제는 봄맞이 갈 친구도 없고, 날도 정말 좋구나 하고 감탄할 날도 없다는 생각에 이르면, 괜시리 눈물이 난다. 그리움을 쫓고자 불렀던 노래가 더욱 그리움을 불러오고, 슬픔을 잊고자 했던 노래가 눈물을 불러오니 이 무슨 조화인가. 다시 부르는 나의 노래는 자연히 낮고 느린 곡조로 바뀐다.
   “자주꽃 핀 건 자주 감자/파보나마나 자주 감자”
   “연못가에 새로 핀 버들잎을 따서요/... 대한 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옵니다”
  따스한 봄날 오후, 창가에 앉아 풍금을 누르며 노래를 가르쳐주던 삼학년 때 담임선생님이며 조그만 입을 모아 함께 노래 부르던 ‘월포’ 친구들의 앙증스런 모습이 ‘자주 감자’와 ‘봄 편지’에 실려 흑백 필름으로 떠오른다. 이제는 가고 없는 선생님. 그리고 지금은 민들레 꽃씨처럼 흩어져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친구들. 봄비가 오면 내 마음도 따라 젖던 이유를 이제사 알 것만 같다.
   봄은 어쩌면 연두 빛 계절도 아니고, 노랑 빛 계절도 아닌지 모른다. 이다지도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봄은 슬프도록 아름다운 무지개빛 계절이 아닐까. 비 오면 잠시 피었다가 지고 마는 일곱 빛깔 무지개. 다시는 찾을 길 없어 허공만 바라보다 끝내는 섭섭하게 돌아서야하는 짧은 무지개. 봄날도 무지개도 그토록 짧은 것을.
   아마도 봄 편지는 길 필요가 없을 것만 같다. 꽃이 곧 지고 무지개 훌쩍 사라지듯 그렇게 가 버린 인생의 봄날을 긴 사연으로 풀어 쓴들 무엇 하리.  내 그리움을 실은 동요 한 곡 아니면 손바닥만한 엽서 한 장이면 족하리.
   채송화 같은 너희들 있어 짧은 봄도 서럽지 않았다고, 내 마음의 엽서를 띄워 본다.
                                                                        (199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