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바다.jpg 

           사계절 뒤에 ‘바다’를 붙여보면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이 된다. 봄 바다, 여름 바다, 가을 바다, 겨울 바다. 하루 중 어느 한 때를 택해서 그 이름 뒤에다 ‘바다’를 붙여 봐도 옛 친구의 이름만큼이나 정답고 예쁜 이름이 된다. 새벽 바다, 밤바다....... 나는 기억 저 편으로 사라져간 친구의 이름을 불러 보듯, 종종 이런 어여쁜 이름들을 혀끝으로 굴려보곤 한다. 시인 정지용이 말했듯이 ‘바다’ 라는 어감이 한없이 좋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항구 도시에서 태어난 갯가 여인의 향수 때문인지도 모른다. 각 계절마다 저 나름의 색깔이 있고 분위기가 있듯이 바다의 표정도 제 각각이다. 봄 바다는 아른아른한 연두빛 희망을, 여름 바다는 불타는 정열을 보여준다. 한 여름의 어지러운 발자욱을 지워버린 가을 바다는 갈색의 고독을, 겨울 바다는 잿빛 공허를 안겨주기도 한다.
   나는 갖가지 표정을 지닌 바다 중에서도 특히 ‘겨울 바다’를 좋아한다. ‘겨울 바다’라는 어감도 어감이지만, 겨울 바다가 주는 그 황량함과 쓸쓸함, 그리고 적막감이 나를 절대 고독 속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어느 철학자로부터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준엄한 경고를 받기도 했지만, 고독도 절망 못지않게 죽음에 이르는 병인 걸 안다. 그럼에도 나는 이런 절대 고독 속으로 종종 자신을 빠뜨린다. 생명을 담보로 한 절대 고독 속에서 오히려 힘을 얻고 있으니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삶이 막막할 때면 난 언제나 바다로 달려간다. 그것도 겨울 바다 아니면, 아무도 오지 않는 밤바다를 택한다. 식인종을 보고도 반가워했다는 로빈손 크루소보다 더 절절한 외로움에 휩싸일 때에도 바다 앞에만 서면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편안해진다. 바다는 어쩌면 내 영원한 모태인지도 모른다.
  어느 해 여름, 부산 해운대 바닷가에서 난 뜻밖에도 ‘겨울 바다’와  해후했다. 갑자기 쏟아진 소낙비를 피하려고 J랑 함께 뛰어든 카페 이름이 바로 ‘겨울 바다’였다. 카페가 그토록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데 대해 난 가벼운 한기마저 느꼈다. 게다가 실내엔 내가 좋아하는 ‘빗방울’이 클래식 기타 선율에 실려 안개처럼 떠돌고 있었다. 까만 드레스의 여자 주인도 그 카페 이름만큼이나 차고 투명해 더욱 우수적으로 보였다.
   탁자를 두고 J랑 마주 앉았다. 구불구불한 원목 탁자가 두 사람을 먼 거리로 갈라놓았다. 하지만, 섭섭하지 않았다. 카페 분위기 때문인지 오히려 평화롭기까지 했다. 안개처럼 카페를 맴돌고 있는 기타의 아름다운 선율과 창 밖에 내리는 빗줄기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점차 생각 속으로 빠져든 나는 그가 살고 있는 한국과 내가 사는 미국과의 넓은 강폭을 가늠하며 탁자 위에 조용히 눈길을 주고 있었다. 탁자 위엔 아무 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그런데 내 마음의 눈엔 이런 짧은 엽서가 읽혀지고 있었다. 마치 카페 주인이 손님들에게 띄우는 한 장의 연서와도 같이.
  
    “이 곳에서는 굳이 이마를 맞대고 얘기를 나누실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눈을 들어 창밖을 보십시오. 거기엔 당신 인생의 잠언이요, 시편인 바다가 펼쳐져 있습니다. 혹, 커피향이 당신의 후각을 자극하면 그때사 마주 앉은 손님에게 눈 맞춤 하십시오. 그러나 여전히 큰 소리로 얘기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그저 연잎에 바람이 스치듯 살풋 작은 미소만 지으시면 됩니다.”
    
   나는 대나무로 성글게 짠 둥근 의자에 몸을 묻고, 비 내리는 창밖을 응시했다. 매달려 있는 빗방울에 또 한 방울이 겹쳐지면 커진 빗방울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창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똑 같은 그림을 그리는 어린아이처럼 빗방울은 계속 똑 같은 몸짓으로 그림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지름이 채 일 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빗방울마저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든 모양이었다. 빗방울도 사람도 삶이란 역시 혼자 겪어내야만 하는 것일까.  
   창 너머 더 먼 곳으로 눈길을 던졌다. 인적은 간 곳 없고 소낙비만 바다를 때리고 있는 여름 바다는 겨울 바다처럼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온통 잿빛 하늘을 가슴에 쓸어안고 누운 바다. 갈매기조차 숨어버린 바다 위엔 발 묶인 유람선만이 비에 젖어 흔들리고 있었다. 문득 바다는 비가 와도 젖지 않는다던 어느 시인의 시구가 떠올랐다. 그런데 비에 젖지 않는다는 바다를 보면서 왜 내 가슴이 젖어드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난 쓸쓸하면서도 포근하고, 포근하면서도 외롭기 그지없는 기분을 진한 커피 향에 타서 마셨다. 실내 음악은 어느 새 ‘두 개의 미뉴에트’로 바뀌었다. 짧고 가벼운 리듬으로, 학창 시절 매일 듣다시피 하던 곡이다. “띠 리리 리리리 리리 리리리, 띠 리리 리리리......” 혀끝으로 가만히 따라 불러본다. 마음 따라 카페 분위기도 약간은 밝아진 기분이다. 우리는 침묵속의 공감을 느끼며 오래도록 그 여운을 즐겼다.
   그 이후로 나는 겨울 바다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여름 바다에서 ‘겨울 바다’를 만난 것은 어찌 보면 고개를 갸웃거릴 일이다. 하지만, 그건 인생의 반전처럼 멋진 일이었고, 내겐 그 해 여름에 얻었던 생애 최고의 여행 보너스였다.
   바다를 곁에 두고 살 수 있는 건 크나큰 행운이다. 더욱이 끝없이 이어지는 에메랄드빛 파도 자락은 이 곳 캘리포니아 사람에게 준 다시없는 신의 선물이다. 일터가 있는 베벌리 힐스에서 서쪽으로 십 오 분만 곧장 달려가면 우리 한인에게도 친숙한 산타 모니카 해변이 나온다. 그래서 그런지 아침마다 집을 나설 때면 바다로 출근하는 환상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 즐거운 상상 때문에 일터로 향하는 내 마음은 늘 노래하는 새가 된다. ‘바다!’하고 가만히 이름을 불러보는 습성도 바다로 향하는 아침 출근 길 때문에 잦아졌는지도 모른다. 바다는 이 먼 미국에 와서도 태평양 끝자락을 몰고 와 출렁이며 나를 부르고 있다. 지금도 난 바다를 놀이의 대상보다는 사색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 겨울 바다를 찾는 횟수가 많다. 인적이 드문 겨울 바닷가에서 해조음에 귀를 기울이며 멀리 수평선에 눈을 주면 나는 어느 새 시인이 되고 철학자가 된다. 여름이 젊은이들의 놀이터라면 겨울 바다는 중년들의 사색터가 아닐까.
   아직은 겨울이 먼 칠월이다. 칠월의 바다도 팔월의 바다도 다 젊은이에게 양보해야할까 보다. 겨울이 오기 전에는 바람 찬 밤바다에 나가 겨울 바다의 그 황량한 분위기를 맛보는 것으로 족해야겠다. 오소소 떨려오는 밤바다 앞에 나를 세우면 절대 고독 속에서 다시금 기운을 얻을 수 있을 게다.
   겨울 바다! 그것은 겨울비와 더불어 영원한 내 마음의 연인이다.   <1998년 ‘수필과 비평’(한국) 신인상 당선작>


 * 당선 소감 * 

 

저는 수필을 ‘아름다움 찾기’라 부르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마음 밭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내 마음 밭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누군가가 발견해주는 기쁨. 이것이 바로 수필의 매력이요, 수필인만이 누릴 수 있는 청복이라 생각됩니다. 제가 유독 수필을 사랑하는 까닭도 이런 이유에서일 겝니다. 이 마음 하나로 남은 날도 계속 수필을 사랑하렵니다. 고쳐도 또 고칠 것이 있는 미완의 글을 내보임에 부끄럽습니다. 초등학교 입학생에게 이름표 하나 달아주신 걸로 알고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심사평 *

   지희선씨의 작품을 문단에 내놓는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씨는 그간 낯선 이국에서 생활하면서도 수필 공부를 계속 해온 사람으로 이미 <문학세계>에 수필로 등단한 경력을 가진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수필 <겨울 바다>는 한 편의 시를 읽는 기분을 느낄 만큼 문장이 유려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표현이 아주 섬세하고 우아하다. 좋은 수필이란 이렇게 시에 가까우면서도 산문의 특색을 잘 살려낸 글이 아닌가 한다. 특히,  어느 여름날 카페 <겨울 바다>에 들어섰을 때 상상력으로 탁자에 한 편의 엽서를 써서 이 글에 삽입한 것은 시적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 데 공헌한 것이 아닌가 한다. 감정이 풍부하고 사고도 깊어서 앞으로 좋은 글을 쓸 수 잇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진을 당부한다. (심사 위원: 이철호, 정주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