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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 방 있습니까?”
   만삭이 다 된 아내를 곁에 둔 요셉의 물음은 너무나 절박했다. 이미 수차례 거절을 당한 처지였기에 마음은 더욱 다급하기만 했다.
   “빈 방 있습니까?”
   그는 문을 두드리며 안타까이 물었으나 여관마다 초만원이라 방을 구할 수가 없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또가 전국에 호구 조사령을 내려 너도나도 고향을 찾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 오고 밤바람은 차가운데 이 밤 산모는 어디서 몸을 푼단 말인가. 마리아도 지쳤는지 남편을 버팀목 삼아 힘없이 기대어 서 있을 뿐이다.
   예나 이제나 막막해질 때면 인간도 슬픈 사슴의 눈을 담는 것일까. 요셉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르렀다. 믿음의 선조들에게 만나를 내려준 기적의 하늘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제라도 어디선가 불기둥이 툭 떨어져 그를 도와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인간의 예감은 번번이 빗나가는 것. 베들레헴을 지키는 청은색 별빛만이 시리도록 그의 눈을 찔렀다. 밤이 되어도 깃들 곳이 없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허전한 일인가. 이때의 불 밝은 창은 요셉에게 있어 하나의 동경이자 고문이었다. 냉냉한 한기와 함께 마음마저 오슬오슬 떨려왔다. 그날 밤, 짭지레한 어떤 수분이 요셉의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저 위에 계셨던 분만이 그의 딱한 심정을 헤아리고 있었으리라. 얼마 후 그가 마굿간이나마 얻게 된 것도 그를 불쌍히 여기신 신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해마다 크리스마스 철이 오면 나의 관심은 기대되는 선물도 아니요, 공짜 같이 얻은 휴가도 아니다. 만인이 경배하는 아기 예수도 아니요, 생모라 해서 세인이 떠받드는 마리아도 아니다. 만삭인 아내를 위하여 안타까이 방을 찾아 헤매는 어진 지아비, 인간 요셉이다. 언제나 주인공의 자리에서 빗겨가 있으면서도 겸손되이 제 소임을 다한 사람. 스쳐가는 영화의 스냅 같은 단역을 맡았으면서도 불평하지 않던 사람. 만약 그가 굳건한 신앙인이요, 건전한 생활인이 아니었던들 하느님의 구속 사업에도 큰 차질이 왔으리라.
   요셉에 대한 나의 애정은 각별하다 못해 집요하다. 왠지 그를 생각하면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무게 있는 역할에 비해서 거의 조명되지 않는 그림자 같은 삶에 대한 연민이랄까. 아니면, 문 두드리며 방을 찾는 요셉의 모습에서 가난으로 상징되는 부모님의 고달픈 삶을 엿보았기 때문일까.
   12월 들어 더 자주 요셉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도 꼭 베들레헴에서 방을 찾아 헤매는 모습이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오래된 앨범 속에 변색되어 있는 누런 옛 사진과도 같이 알싸한 아픔을 가지고 다가온다.
  
   배경 도시는 늘 나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고향 마산이요, 장소는 큰 아버지 집 처마 밑이다. 초가을비가 추절추절 내리는 어스름 저녁, 야전 침대 위에 옹기종기 꼬마들이 세로로 몸통만 걸친 채 누워있다. 다름 아닌 나를 위시해서 언니, 오빠, 동생들이다. 어린애들이라고는 하나 여섯 명이 눕기에는 너무도 좁았다. 할 수 없이 엄마는 귀퉁이에 엉덩이만 걸친 채 시름에 겨워 앉아 있다. 땅에 닿지도 않는 짧은 우리들의 다리는 침대 가장 자리에 종아리만 걸친 채 달랑거린다. 철없는 우리는 그네를 타듯 다리를 앞뒤로 흔들어댔다. 심심한 우리들에게는 그것도 놀이가 되어 재미있었다. 그런 우리를  엄마는 그저 측은한 듯이 바라보았다. 담요는 덮었던가?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차가운 가을비가 바람에 불려와 나의 얼굴을 적시던 기억만이 뚜렷하다.
   그때 내 나이 대 여섯 살. 6.25 사변의 뒤 끝이기도 했지만, 일본에 가신 아버지와 소식이 끊겨 우리는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다. 뒤에 안 일이지만, 미묘한 한일 관계로 무역선은 물론이요, 아버지를 위시해서 모든 선원들이 억류되었다고 한다.  물론, 가족과의 연락도 완전 두절된 상태였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백방으로 살 구멍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때가 때인지라 쉽지 않았다. 급기야 셋집에서도 쫓겨나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올망졸망한 아이들 여섯을 앞세우고 큰 아버지 집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방을 구할 때 까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여 허락을 받았던 것 같다. 큰 아버지 집은 크담한 기왓집에 길 쪽으로 난 아래채는 중국 음식점까지 달고 있어 한 두 달은 먹여줄 만했다. 하지만, 기약 없이 눌러 붙어있는 처지가 되니 큰 아버진들 반가우랴. 게다가 애가 없어서 적적하긴 해도 조용하던 집안에 애들 소리 왁자하니 그것 또한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을 게다. 급기야 그는 어머니께 언제까지 방을 얻어나가라는 최후통첩을 했다. 그러나 최후통첩 날짜가 지나도 나갈 기미가 없자 아예 우리를 내쫓아 버렸다. 흥부 가족이 따로 없었다. 다만, 흥부 같은 아버지가 없었고 자식 숫자가 조금 틀렸을 뿐이다. 그나마 요셉이 마굿간을 제공 받았듯이 우리도 야전 침대 하나를 얻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머니도 요셉처럼 피곤한 다리를 끌고 빈 방을 찾아다니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적은 돈에 자식 여섯을 달고 방을 얻기란 쉽지 않았다. 그 날 저녁, 우리는 만두 한 두 개로 저녁을 때우고 간간이 뿌리는 가을 빗발을 얼굴에 받으며 잠을 청했다. 그 착잡했던 가을비의 감촉이 어제런듯 생생하다.

   그러고 보면, 숙소를 찾아 헤매는 요셉에 특별한 연민의 감정을 갖는 것도 내 기억의 저 편과 끈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요셉과 어머니, 마굿간과 야전 침대. 이 등식은 숙명적인 관계로 인 박혀, 끊임없이 나의 애정과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요셉에 대해서, 어머니에 대해서, 그리고 가난한 이웃에 대해서. 이 후 ‘빈 방’은 내게 숙소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제 머잖아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 테니슨이 되어 내 귓전을 두드리고, 에밀레종이 되어 내 무딘 마음을 칠 때 나는 또 다른 요셉과 어머니, 그리고 내 이웃들로 인해 마음이 아플 게다. 그들은 집 없는 거지일 수도 있고, 올림픽가에서 하루 일당을 위해 웅성거리고 있는 불법 체류자일 수도 있다. 아니면, 우리나라의 수몰민이나 철거민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르완다의 난민이나 소말리아의 어린 아이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에게 닫혔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루까의 ‘엠마우스’를 들려주고 싶다.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누리는 어둠에 잠겼아오니/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소서/ 주여, 이 밤을 쉬어 가소서.”
   오늘은 어둠이 들앉은 방에 등불을 켜고 진정 누군가 청하고 싶은 밤이다. 갈 곳이 없어 서성이는 사람이면 누군들 나의 주님이 되지 않을까. “빈 방 있습니까?” 하고 묻는 사람은 “내게 사랑을 줄 수 있습니까?” 하고 묻는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1994년 문학세계(미국) 신인상 당선작>

*<당선 소감>*
   정은 코카콜라인가.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을 느끼게 하는 것. 그러면서도 끝내 다시 찾게 되는 것. 나는 반평생을 정 찾아 헤매도는 부나비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만 같다. 아마 태성인가 보다. 많은 문학 쟝르 중에서도 유독 ‘수필’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인간적인 ‘정의 문학’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너를 만날 수 있고, 나를 열어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영토. 나는 이 작은 땅을 나만이 가진 아름다움으로 곱게 가꾸어 나가고 싶다. 여전히 울타리는 두르지 않을 예정이다.
   고치고 또 고쳐도 다시 고칠 것이 있는 미완의 글을 내 보임에 부끄럽습니다. 분발하라는 격려로 알고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글마루>를 통해 문학의 갈증을 씻어주시는 고원 교수님과 글벗들, 그리고 먼 고국에서 몇 년 째 수필 문학지를 부쳐주는 유소장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지희선씨의 ‘빈 방 있습니까“를 엮고 있는 성경 사건과 인간 사회의 복합 구도는 기술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면을 극복하는 일에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신앙과 현실이 양면으로 떨어져 있는 간격을 무리 없이 메우고 있어서 확대되는 화폭 전체에 인간미가 짙게 채색되어 있다. 흔히 보는 신변잡기가 아니라, 깊이 있게 사람이 사는 얘기가 감동적이다. (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