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 막힌 병에 창이 있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읽고 너는 나를 읽고.
너와 나, 막힌 벽이 아니라
너와 나, 소통할 수 있는 유리창을 지니고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가.
저 언덕 아래서 올라오는 연인을 보고 있을 때,
마음까지 꽁꽁 얼어 있는 날 성에 낀 유리창에 문득 그리운 이름을 써 보고 싶을 때,
나는 늘 창 앞에 서곤 했다.
나는 창을 사랑한다.
큰 통유리 앞에 서서 아름다운 정원을 응시하고 눈을 들어 푸른 하늘에 떠도는 흰구름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에 무한한 행복감이 차 오른다.
리틀락에 이사 와서도 창을 여덟 개나 더 냈다.
백인이 살던 집은 무슨 비밀이 그리 많은지 방들이 벽으로 막혀 꼭꼭 숨어 있었다.
비밀이 없는 나는 벽을 헐어 창을 만들고 펼쳐진 들판과 산과 하늘을 모두 친구로 불러 들였다.
나무 한 그루 없이 말을 타던 휑한 마당에 각종 과실수를 심고 수영장 건너편으로 하얀 담을 치고 염소를 기르니 제대로 사람이 사는 집 같았다.
나는 침실에서 바로 내다 뵈는 창 밖 수영장 풍경과 염소 울음 소리를 듣는 게 더없이 좋았다.
어젯밤 딸집에 왔다.
사방 향나무에 싸여 있고 창이 많아 나는 창 앞에 서서 창밖 구경하길 좋아한다.
방 침대 곁에서도 보고 베란다창 밖에서도 보고.
무엇보다 '밥그릇을 바지런히 섬기며' 부엌창 밖을 보는 걸 좋아한다.
무덤과 집의 차이는 창의 유무라고 한다.
무덤엔 창이 없다.
창을 지니고 있는 이 세상, 비록 사는 일 고달파도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나.
어머니 살아 계실 때, 어머니도 창 앞에 서기를 즐기셨다.
외로워서......
창 곁에 서서 어둔 새벽길을 달려가는 차량들을 응시하곤 했단다.
차량들의 소리는, 거두어간 모든 소리를 어머니께 되돌려 주며 살아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자식들의 방문도 뜸하고 전화 한 통 없을 때, 이 세상  소리란 소리는 다 거두어 가고 없는 밤, 혹은 고요한 새벽.
어머니는 소리가 그리워 프리웨이를 향한 창문을 여셨다.
창 앞에 서서 지축을 흔들며 달려가는 차량 소리를 들으면 생의 활기를 느껴 좋았다.
마치 죽어 있는 세포가 다시 살아나 맥박이 팔딱이는 기분이 들었단다.
젊은이에겐 차량 소리가 '소음'에 불과하지만, 노인 아파트에 사는 독거 노인에겐 그 소리마저 정다운 친구가 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차량소리보다 못한 딸자식의 불효를 가슴으로 느끼며 눈시울을 붉혔던 기억이 난다.
창 앞에 서서 흐린 풍경 너머로 보이는 어머님을 잠시 떠올리다, 다시 '바지런히' 밥그릇을 섬긴다.
생활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딸 자식이 일어나기 전에 따뜻한 국 한 그릇, 반찬 하나 더 올려 놓아야 한다.
창아, 어머니와 더불어 벗이 되어 주었듯이 나와 더불어서도 영원한 벗이 되어 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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