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접은 흰 나비.jpg
 
초여름 날
만 사년 이십일을 이쁜 짓 다 하더니
비 오던 초 여름날 내 손 놓고 떠났고나
실실이 초 여름비 내리면 다시 괴는 눈물비
 
아가가 갔다. 오랜 가뭄 끝에 첫 장마비가 시작되던 초여름 날이었다. 420. 앞당겨서 차려준 네 살 생일 케이크를 받고도 그 애는 먹지 못했다. 초대 되어 온 태권도 친구 몇 명만이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케이크를 입에 넣고 있었다. 아이들은 한 달 전만 하더라도 기합소리 우렁차게 외치던 친구가 왜 먼 길을 떠나야 하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건 어른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영화 속에서만 보던 백혈병 주인공이 야생화처럼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창밖에는 플라타너스가 넓은 잎으로 굵은 빗방울을 받아내고 있었다. 후드득후드득. 아이에게 그늘을 주고, 아이가 먼 길을 갈 제 호올로 외로울 제동행해 주었을 플라타너스. 지금도 나는 비 오는 날이면 유월의 플라타너스를 기린다. 내 기억 속에 가두어 둔 네 살배기 그 녀석을 기린다.
 
가을 날
단풍은 단풍대로 은행은 은행대로
제각금 속울음을 토해내는 가을날
하늘엔 솔개 한 마리 속울음도 잊었다
 
가을이다. 푸르렀던 기억은 추억으로 쟁여두고 제가끔 길 떠날 채비를 한다. 떠날 때는 가장 멋진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노을이 아름다운 것도 길 떠날 채비를 하기 때문이다. 그 녀석은 태권도 도복을 제일 좋아했다. 관에 태권도 도복을 넣어주고 못을 박으며 사범은 꺽 꺽 울었다. 떠날 때 나무는 잎을 버리고 나는 말을 버렸다. 눈물도 버렸다. “잘 가, 안녕!” 마지막 인사도 입술로만 달싹거렸다. 무심한 솔개 한 마리 맴을 돌며 하늘에 커다란 원만 그리고 있었다. 라이프 이즈 서클. 나는 윤회설을 믿고 싶었다. 그동안 가을이 참 많이도 다녀갔다.
 
겨울 날
함박눈 흰 나비 떼 온 천지에 휘날리면
깊은 산사 솔가지 쩌엉 쩡 부러지고
깃털 그 가벼움마저 천근 무게로 내리앉는 밤
 
그 애가 떠나고 첫 겨울이 왔다. 산사를 찾았다. 함박눈이 흰 나비 떼 되어 천지에 휘날렸다. 코트 깃에 내린 눈송이는 이내 녹아버렸다. 잠시 내 곁에 왔다 떠난 아이처럼. 바람이 불고 날리는 눈발 위로 햇빛이 얹혔다. 무지개빛이었다. 아름다웠다. 산사를 오르는 발걸음을 재촉할 필요는 없으리. 무지개빛 눈발을 받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산길을 올랐다. 찰나의 아름다움은 이내 사라지고 산사에 어둠이 찾아들었다. 산사의 밤은 적막했다. 깊은 밤이 되자 굉음이 잠자는 산을 깨웠다. 쩌엉쩡.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솔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깃털처럼 가벼운 눈송이도 쌓이면 천근 무게로 내려앉는가. 잠시 흰 눈발과 내 슬픔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여전히 바람 불고 눈이 내렸다.
 
봄 날
봄빛도 눈 부셔라 반 쯤 눈 뜬 민들레꽃
길 가던 하얀 나비 날갤 접고 앉고나
아가야, 네 영혼은 어디에 날갤 접고 앉았나.
 
봄은 어김없이 왔다. 찬바람에 온기가 드니 천지가 색채의 향연이다. 야산은 연초록 풀과 노란 유채꽃으로 수채화 한 폭을 그렸고, 우리 집 잔디밭은 노란 민들레랑 보색대비를 이루며 유화 한 폭을 선사한다. 잡초나 뽑을까 하고 채소밭에 내려섰다. 그때, 어디선가 흰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무꽃 위에 날개를 접고 앉았다. 그 순간, ‘하고 숨이 멎었다. 날개 위에 영혼을 얹고 있어 늘 하느작하느작 난다는 전설의 하얀 나비. 마치 내 아이가 다시 살아온 듯했다. 아이가 간 다음 날 아침, 채 소식을 전하지도 못했는데 아이 숙모로부터 전화가 왔다. 혹시 간밤에 무슨 일이 없었느냐고. 나는 섬뜩해서 물었다. 어떻게 아느냐고. 아침에 빨래터를 향하는데 흰나비 한 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계속 따라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평소에도 잘 따르던 숙모였다. 그 이후로 나는 늘 흰나비 환상에 젖어 살고 있다. 길을 걷다가도 흰나비가 내 주변을 맴돌면 가던 길을 멈추고 가만히 지켜보곤 한다. 사람들은 계절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눈다. 하지만, 어미의 사계는 초여름으로 시작되어 봄날로 끝난다. 아니, 끝나는 게 아니라 그렇게 계속 순환한다. 라이프 이즈 서클. 계절도 서클이고 사랑도 서클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서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