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카란타1.jpg

 

 

1

어린 딸 둘 남기고 오월에 떠난 안나

노을도 흘러들어 검은 상복 적시고

제대포 하얀 촛불도 함께 울며 흔들리네

 

2

한 목숨 스러져도 돋아나는 풀잎들

쟈카란다 꽃등 들고 가는 길 밝히리니

친구여, 연보라 꽃길로 사뿐사뿐 가시게

  

   보랏빛 쟈카란타꽃이 거리 곳곳에 꽃등을 밝힌 오월 어느 날이었다. 불현듯 팜 드라이브 길로 달려가고 싶었다. 오월이면 쟈카란타 꽃 터널로 장관을 이루는 팜 드라이브 길은 너무나 아름다워 사랑에 멀미를 앓게 한다. 혼자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길, 혼자 걷기에는 더더욱 아쉽고 슬픈 길이다. 꼭 누구랑 함께 보고, 함께 걸어야 할 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죽 좋으랴. 하지만 친구를 부른다 한들 어떠리. 아름다움을 느끼고 아름다움을 동경할 줄 안다면 그뿐. 떠오르는 친구가 있어 전화했더니 흔쾌히 응했다.

   우리는 산타모니카 거리를 따라 서쪽으로 달렸다. 도헤니를 지나고 드디어 팜 드라이브다. 아, 연보라의 향연. 산타모니카 거리에서 윌셔까지 뻗은 쟈카란타 가로수는 서로 손을 맞잡은 듯 가지마다 꽃등을 달고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길 위에는 조그만 종 모양의 보랏빛 꽃이 무수히 떨어져 마치 보랏빛 카펫을 깐 듯 아름다웠다. 우리는 내려서 레드 카펫 위를 걷듯 우아하게 걸었다.

   그런데 왜 아름다움 앞에만 서면 슬퍼지는 걸까. 보라색이 주는 슬픔인지, 아름다움의 유한성이 주는 아픔인지 점점 아련한 감정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분위기에 젖었던 것일까. 친구는 때마침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안나라는 친구 이야기였다.

   안나는 평소에 간질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그날도 아침 출근을 위하여 샤워하고 있는데 불행히도 그 시간 발작이 일어났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그녀는 그 길로 영영 떠나고 말았다. 남편도 없던 그녀는 달랑 두 딸만 남겨두고 그렇게 떠났다. 열다섯 살과 여덟 살의 어린 딸은 일시에 고아가 되어버렸다. 더욱이 둘은 아버지가 각각 다른 아이였다.

   첫 아이의 아버지가 이 소식을 듣고 뉴욕에서 달려왔다. 딸을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는 이혼한 전처가 재혼을 한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아이까지 있다니. 그는 비현실적인 현실 앞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큰 딸 아이가 제 아버지를 만나러 뉴욕으로 갈 때마다 안나는 단단히 입조심을 시켰다고 한다.

   비영주권자와 재혼을 하고 영주권을 받자마자 그녀를 떠나버린 비정의 둘째 남편을 그녀 자신도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일까. 그런 사람과의 사이에 아이까지 있다는 말은 자존심상 차마 하지 못했던 것일까. 첫아이에 대한 양육비가 끊길까 봐 걱정했던 것일까. 그녀의 깊은 심중은 아무도 몰랐다. 다만, 이 현실 앞에 망연자실한 첫 아이 아버지는 당연하게 큰 애만 데려가겠다고 했다. 남의 아이를 키워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뜻밖에도 큰 아이는 동생을 혼자 두고 갈 수 없다며 거절을 했다. 아,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소녀. 그녀의 마음 어디에 이토록 애틋한 자매애가 있었던 것일까. 보는 이들은 다 함께 눈시울을 적셨다. 결국, 두 어린 자매는 이웃의 손에 남겨지고 첫 아이 아버지는 눈물을 머금고 뉴욕으로 되돌아갔다.

   친구는 “아이들이 딱해, 아이들이 딱해.”하며 몇 번이나 되뇌었다. 나도 마음이 먹먹해 왔다. 모두가 불쌍했다. 죽은 이도 산 이도. 아이들도 그 아버지도. 안나는 어떻게 눈을 감고 갈 수 있었을까. 아마도 눈조차 제대로 못 감고 갔을 것만 같다.

쟈카란타 보라색 카펫은 더 이상 우아하게 걸을 수 있는 레드 카펫이 아니었다. 슬픔의 카펫. 우리 누구나 한번 쯤은 눈물을 뿌리며 걸어갔을 그리고 걸어가야할 길이었다. 쟈카란타 꽃등이 작은 종소리로 울려댔다. 바람과 함께 흔들리며 울고 있었다. “잘 가란다, 잘 가란다.”

   그래, 그래서 네 이름도 쟈카란타인지도 모르지. 안나 씨, 부디 잘 가세요. 만난 적 없는 나도 그녀의 가는 길에 보라색 꽃등을 밝혀주고 싶었다. 그날 밤, 나는 시조가 뭔지도 모르면서 내 생애 처음으로 그녀를 위한 조시를 썼다. 그녀의 영혼을 위로해 주지 않고는 도저히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그 이후로 십 년도 더 지났다. 다시금 오월은 오고 팜 드라이브의 쟈카란타 꽃 터널은 또다시 날 사랑으로 멀미를 앓게 한다. 이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슬픔까지 가미한 팜 드라이브의 쟈카란타. 몇 년째 가 보지 못한 길. 그곳에서 오늘도 오월의 쟈카란타는 바람이 불 때마다 종소리를 내며 울고 있겠지. “잘 가란다, 잘 가란다”하고. 고 작은 몸으로 저도 슬픔에 겨워 함께 떨어지면서.   

   남겨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부디 잘 자랐기를 소망하며 작은 성호를 긋는다. (09-1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