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jpg

 

 

   

    - 사탕 열 여섯 개를/너희들 넷이서/ 나누어 먹으면/몇 개씩 먹지?/....../세 개요/다시 한 번 생각해 봐/....../세 개요/딱!/굴밤 한대/네 개는/엄마 드리려고요/엄마는/ 나를/와락 끌어 안으시더니/우신다 (김교현의 '나눗셈')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동시 공부를 하다가 발견한 시라며 김교현 작가의 동시 <나눗셈>을 들려주었다. 동시를 많이 읽지 않던 내게도 무언가 찡하게 전해오는 게 있었다. 엄마를 생각하는 아이의 순수한 마음은 잊고 지낸 우리의 어린 날을 되돌아보게 했다.

우리 형제는 여섯 명이다. 아들 둘 딸 넷이다. 언니가 맏딸이고 오빠와 나 여동생 남동생 그리고 막내 여동생 순이다. 6.25 사변 이후, 대부분의 집들처럼 우리집도 가난하였다. 전후 몇 년이 흘렀어도 경제 사정은 나아지지 않은 채 아이들만 늘어났다. 우리 입에 간식은커녕 조석간에 밥 먹기도 힘들었다. 엄마 역시 채 30이 될까 말까한 나이로 배고픈 심정은 우리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우리와 함께 음식을 드시고 계셨던 모습은 좀체 떠오르지 않는다. 언제나 우리만 그릇에 머리를 박고 부지런히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간 기억뿐이다.

   어머니는 분명 숱하게 굶으셨을 것이다. 나는 왜 이제야 그 생각을 떠올린 것일까. 가끔 어릴 때 추억에 잠겼어도 어머니가 우리보다 훨씬 많이 굶으셨을 거란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이 동시 속의 아이는 그래도 엄마를 생각하며 엄마 몫을 남겨둘 생각을 했었나 보다. 이제는 가고 없는 어머니, 옛날이야기 하며 맛있는 것을 사 드릴 수도 없게 된 어머니. 효도를 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옛말이 새삼 뼛속까지 사무쳐 온다. 얼마 전에 기일 일주기를 맞은 터라 안타까운 마음은 더욱 나를 슬프게 한다. 남의 얘기로만 들렸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가 새삼 가슴 밑바닥을 차고 올라오는 것도 나의 개인사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심순덕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도 한 때 소녀였고 처녀였고 여자였지만 우리에게는 그저 어머니로만 보였다. 언제나 믿음직한 반석이셨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조주였다. 분명히 돈이 없었는데도 약속은 꼭 지키셨다. 없는 형편에도 학교를 보내주셨고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일류 양장점에 가서 옷도 맞추어 주셨다. 그런 어머니도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옷이나 새 신발을 사 신으시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준 옷을 줄이고 늘여서 즐겨 입으셨고 속옷도 누가 보느냐며 새 것은 아껴두고 헌 옷부터 입으셨다.

   그릇도 예쁘고 좋은 것은 우리에게 주셨고 어머니는 연륜이 묻어서 좋다며 언제나 타고 찌그러진 냄비를 깨끗이 닦아서 새 것인 양 쓰셨다. 나이가 드셨어도 우리는 어머니가 벌써 80이 되었네하고 잠시 생각했을 뿐 언제나 씩씩하고 생기발랄한 젊은 엄마로만 기억할 뿐이었다. 자식들이 온다고 한 상 가득 차려주면 그것도 당연한 듯이 받아먹었다. 그마저, 짜네 싱겁네 하며 엄마의 달라진 혀 맛만 탓했을 뿐, 입맛을 잃어버린 팔십 노인의 무딘 혀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무거운 찬거리를 들고 몇 블럭을 걸어온 엄마의 노고도 다음에는 그러지 마세요 정도로 얼버무렸다. 분명히 또 음식을 해 주시려고 무 하나 사다 놓고 명태 한 마리 사다 놓고 몇 번이나 노인 아파트에서 마켓까지 오르락내리락 하실 걸 알면서도 우리는 대수롭잖게 지나쳤다. 운동삼아 그 정도야 하실 수 있겠지 속으로 생각하면서. 아, 나야말로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렇게 해주실 줄 알았다.

   눈썹이 자꾸만 희미해져 타투를 해볼까 하면 "그 나이에 무슨 타투..."하며 말렸다. 검버섯이 흉하다고 밤마다 허연 약가루를 바르면 그거 다 소용없다며 자연스런 게 최고의 미라며 어머니의 행동을 우스운듯이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배가 아파서 매운 걸 못 드신다고 해도 노인네(그때는 또 어찌 엄마를 노인네라고 인정했을까.)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쳤다. 보건센터에서 점심을 반도 못 드시고 싸 가지고 오신 음식을 냉장고 여기저기 끼워 놓으면 제발 그러지 말라고 훈계까지 하며 내버리기 일쑤였다. 속이 거북하다해도 음식 조심하라는 인사말만 반복했다. 뿐인가. 어디 아프다고 하소연하면 우리한테 말하면 어쩌느냐 면서 의사한테 가 보라고 당연한 말만 되풀이했다. 우리 어머니는 큰 병이고 잔병이고 없으셨으니까. 평생 병하고는 담 쌓고 사시는 분인 줄 알았다. 우리의 무심한 한 마디와 행동 하나가 어머니 가슴에는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었는지 그때는 정말 몰랐다.

   어머니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을 때 그제야 우리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왜 매운 것을 그토록 못 드셨는지, 왜 보건센터에서 주는 맛난 음식을 반도 못 드시고 오셨는지...... 어지간하면 참을성 많은 분이 왜 자꾸만 속이 거북하다고 하소연을 하셨는지. 주치의마저 노인네라서 그렇다며 소화제만 주었으니 어머니는 어디 한 군데 하소연할 데 없이 혼자서 병마와 싸워 오신 것이다. 그래도 우린 어머니가 위암마저 이겨내실 줄 알았다. 엄마 사전에 불가능은 없었으니까. 무심했던 우리는 엄마를 믿어도 너무 믿었다. 그 믿음은 어머니가 전 생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자세이기도 했다.

   "갈 때는 다 이름 하나 받아 간다더니......" 어머니는 그 말 한마디로 섭섭한 마음을 비추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으시는 듯했다.

   "그래도 의사 처방 잘 따르고 식이요법 잘 하면 어찌 되겠지 뭐. 위암 걸렸다고 어디 다 죽나." 어머니는 간까지 전이된 위암 말기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않으셨다. 그러나 막내딸이 병문안을 오자, 어머니는 참았던 설움을 다 토해내며 어린 애처럼 흐느껴 우셨다. 어머니의 단아한 모습이 83년만에 처음으로 무너진 날이었다. 그때 나는 보았다. 어머니도 약하기 만한 보통 사람이었다는 것을.

겨우 한 달. 억지로라도 약을 드시려 애쓰시던 모습도 소용없이 어머니는 그리도 빨리 가셨다. 평생을 자식 덕 보기보다 자식에게 덕을 베풀고 사시더니 가실 때에도 자식 짐 덜어주려 그리도 빨리 떠나신 모양이다. 어머니 가신 뒤에 유품을 정리하며 우리는 또 한 번 가슴을 쳐야 했다. 혈압약, 관절염약, 수면제, 진통제...... 무슨 약병이 그리도 많은지. 그 중에서도 진통제 약이 제일 많았다. 어머니는 그토록 많이 아프셨구나. 그러면서도 우리한테는 일체 아프다는 내색을 안 하셨구나. 잠 못 드는 밤도 그렇게 많았었구나. 약 먹기를 죽기보다 싫어하시는 분이 수면제까지 드시고서야 잠을 청하시다니...... 울어보아도 소용없다는 유행가 가사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눈물을 훔쳐가며 어머니 수의에 처음이자 마지막 동정을 달았던 언니. 어머니란 단어만 봐도 울컥해서 내게 <나눗셈>이란 동시를 읽어주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 돌아가신 뒤, 쓸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언니랑 공원으로 갔을 때 언니는 멀거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분위기를 바꾸려고 동시 하나 지어보라는 내 말에 언니는 단 한 줄로 그 마음을 표현했었다.

  

   "들어갈 때는 파란 하늘이 나올 때는 까만 하늘이었습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병원에 첫 방문 왔을 때는 철의 여인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실 줄 누가 알았으랴. 하늘은 파랗고 4월의 훈풍은 여기저기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으니. 한 달 후, 영안실로 어머니를 보내고 병원 문을 돌아서 나올 때 하늘인들 성했을라고. 하늘이 아니라 온 세상이 다 까맣게 보였을 테지.

   이제 어머니는 가고 안 계신다. 우리는 올해 처음으로 어머니 없는 새해를 맞았다. 세배를 받을 사람이 없어지자, 새해도 새해 같지 않았다. 우리는 웃었지만 우리의 마음은 울고 있었다. 곧 어머니날이 온다. 우리는  작년에 이어 다시 어머니 없는 어머니날을 맞이하게 된다. 앞으로도 우리는 어머니 없는 기념일을 계속 맞이하게 되겠지. 우리에게는 어쩌면 오랫동안 푸른 하늘도 까만 하늘로만 보일 것 같다.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던 어리석은 나날들. 그리고 그 어리석음마저 어머니의 사랑 속에 묻히며 살아온 나날들이 이제는 회한과 후회 속에 하루하루 지나가고 있다. "내 죽고 나면 너거도 후회할 끼다."하던 말씀이 이명처럼 자꾸만 귀에 울려온다. 가끔 서운해 하며 속내를 드러냈던 이 말씀마저 흘려들었던 불효를 후회한들 무엇하리. 다만, 오월의 라일락 향기에 내 죄송한 마음만 실어 보낼 뿐. (05-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