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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 짓기 >

잔돌 주워




돋보기로 햇빛 모은다

지지지
종이가타고,
살이 타고,
혼이 탄다

아, 끝내
미완의 사리
한 줌 재만
남는다.

   글 쓰는 일이 모두 잔돌 주워 돌탑 쌓는 일인지도 모른다. 시조 짓기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주변에 흔히 잔돌같이 뒹굴고 있는 하찮은 것들이, 어느 날 조약돌처럼 동그마니 눈을 뜨고 나를 본다. 이름을 불러 달라고. 향기를 맡아 달라고. 그러면 나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그 조약돌에 눈맞춤을 한다. 관심을 가지고 마음 문을 여는 순간, 하찮은 돌도 새삼 의미를 가지고 다가온다. 그때부터 나는 그 조약돌과 함께 놀기 시작한다. 돋보기를 가지고 햇빛과 노는 아이처럼, 조약돌을 요리조리 돌려보며 한참을 논다. 어느 정도 스케치가 끝나면, 작품이랍시고 하나 적어본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미완의 작품이다. 고치고 또 고쳐도  흡족하지가 않다. 주무르고 또 주무른 ‘등심 주물럭’이 채 맛도 들기 전에, ‘곤야꾸’로 변해버린 낭패감이라니. 한 줌의 사리는커녕, 한 알의 사리도 건지지 못한 채, 밤은 하얗게 지나가 버리고 원고 마감 날이 된다. 하지만, 오늘도 내가 주운 조약돌을 가지고 아끼며 노는 것은, 재가 되어버린 내 미완의 글이 언젠가는 녹 쓴 유기그릇을 닦아줄 날도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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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베어 가는 길 >

빅베어 가는 길은
생각 밟고 가는 길

아득히 내려다 뵈는
인간 세상 동화런가

폴폴폴 흩날리는 흰 눈발
내 무게가 미안타

칼바람 맞고 서면
너도 없고 나도 없고

별빛 총총 하늘 아래
생각마저 걷어내면

오호라, 지구도 몸 가벼워
풍선처럼 떠가누나.  

   그랬다. 빅 베어 가는 길은 생각 밟고 가는 길이었다. 언제나 왁자하게 떠들며 피스모 비치로 떠나는 여름 MT와는 달리, 겨울 MT를 위해 빅 베어 산장을 향할 때는 약속이나 한 듯 조용했다. 눈 내리는 밤, 빅 베어 밤길을 꼬불거리며 한참 올라가다 보면 아찔하기도 했지만, 겨울 풍경 속으로 모두 침잠해버리는 듯했다.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눈을 맞으며 엎디어 있는 밤마을은 마치 동화 세상 같았다. 어둠 속에 깜빡이고 있는 불빛들은 잃어버린 동화라도 들려주려는 듯 자꾸만 말을 걸어왔다. 불 켜진 창 안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나른한 휴식을 취하며 하루를 마감하고 있을 사람들이 다정한 이웃인 양 느껴졌다. 숨고르기를 위해 잠시 휴게소에서 내린 우리들 뺨 위로 빅 베어 정상의 칼바람이 스쳐갔다. 폴, 폴, 폴. 흩날리는 흰 눈발은 하얀 목련 꽃 같이 가볍게 아주 가볍게 흩날리고 있었다. 갑자기 내 무게가 미안했다. 육신의 무게보다 생각의 무게를 내려놓고 싶었다. 무념무상. 나도 지구도 풍선처럼 둥둥 떠가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자유 의지가 아니라, 빅 베어 정상에서 불던 칼바람과 흰 눈발이 준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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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모의 팜트리>

버리고 또 버려도
여지껏 못 버린 것

잊으려 애를 써도
상기도 못 잊는 것

소소한 생각
몇 걸어두고
뒤척이는 그대여

   한 해가 지는 길목, 세모의 팜트리가 자꾸만 내 눈길을 잡아끈다. 버릴 것 다 버리고도 여지껏 버리지 못한 생각을 몇 이고 너울거리는 팜트리가 애잔하다. 한 해가 지기 전에 다 버리지 못한 생각은 무엇이며, 무릎 꿇고 올려야할 마지막 기도는 무엇일까. 나무 끝에 눈길을 주면, 갈가리 찢겨 너울대고 있는 잎새들. 그 가녀린 몸매 위로 얼마나 형벌 같은 삶이 뙤약볕처럼 내려 쪼였기에 저리도 갈가리 찢겨져 있는 것일까. 우리네 이민자의 삶이란 게 저와 다를 게 뭐람. 하얗게 밤이 새도록 잠 못 이루며 뒤척이고 있는 이가 어디 저 뿐이랴. 하지만, '삶이란 견디어 내는 것'이라 하지 않던가. 팜트리를 볼 때마다 남 다른 연민이 이는 것도 나의 삶과 무관하지 않아서일 게다. 25년 전, LA 공항에 첫발을 내려놓으면서부터 제일 먼저 눈맞춤 했던 팜트리는 오늘도 나와 애증을 함께 하는 친구다. 쌩-하고 한 줄기 바람이 스쳐가자, 갈가리 찢긴 잎새 사이사이로 금빛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저 금빛 햇살! 황홀한 위안인가. 찢기운 마음 위에도 금빛 햇살은 얹히누나. 아아, 바람 불어 좋은 날이다. (2008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