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삼태기의 흙

  

지난 경인년(1470)에 큰 가뭄이 들었다. 정월에서부터 비가 오지 않더니, 가을 7월까지 가뭄이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땅이 메말라서 봄에는 쟁기질도 못했고 여름이 되어서도 김맬 것이 없었다. 온 들판의 풀들은 누렇게 말랐고 논밭의 곡식들도 하나같이 모두 시들었다.

  이때 부지런한 농부는,

  "곡식들이 김을 매주어도 죽을 것이고 김을 매주지 않아도 역시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냥 팔짱끼고 앉아서 죽어 가는 것을 쳐다만 보고 있기보다는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살리려고 애를 써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다가 만에 하나라도 비가 오면 전혀 보람 없는 일이 되지는 않으리라,"

하고, 쩍쩍 갈라진 논바닥에서 김매기를 멈추지 않고 다 마르고 시들어 빠진 곡식 싹들을 쉬지 않고 돌보았다. 일년 내내 잠시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여, 곡식이 완전히 말라죽기 전까지는 농사일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한편 게으른 농부는,

  "곡식들이 김을 매주어도 죽을 것이고 김을 매주지 않아도 역시 죽을 것이다. 그러니 부질없이 분주히 뛰어다니며 고생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내버려두고 편히 지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만약 비가 전혀 오지 않으면 모두가 헛고생이 될 테니까."

하였다. 그래서 일하는 농부나 들밥을 내가는 아낙들을 끊임없이 비웃어대며, 그 해가 다 가도록 농사일을 팽개치고 들어앉아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가을걷이를 할 무렵에 내가 파주(坡州) 들녁에 나가 논밭을 보니, 한쪽은 잡초만 무성하고 드문드문 있는 곡식들도 모두가 쭉정이뿐이었고, 다른 한쪽은 농사가 제대로 되어 잘 익은 이삭들이 논밭 가득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렇게 된 이유를 마을 노인에게 물었더니, 농사를 망친 곳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하며 농사일을 하지 않은 농부의 것이었고, 곡식이 잘 영근 곳은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고 농사일에 애쓴 농부의 것이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추진위원회 국역연수원교양강좌 자료)

  한 때의 편안함을 찾다가 일년 내내 굶주리게 되었고, 한 때의 고통을 참아내어 한해를 배불리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아! 열심히 일을 하면 뜻한 바를 이루고, 편안하게 놀기만 하면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농사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시서(詩書)를 공부하여 벼슬길에 나아가려 하는 사람들도 어찌 이것과 다르겠는가. 선비들이 젊었을 적에는 학문에 뜻을 두고 밤이나 낮이나 열심히 책을 읽고 쉬지 않고 글을 짓는다. 그렇게 닦은 재주를 가지고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솜씨를 겨루는데, 시험에 한 번 떨어지면 실망을 하고 두 번 떨어지면 번민하고 세 번 떨어지면 망연자실해 하면서 이렇게 말을 한다.

  "공명(功名)을 이루는 것은 분수가 있는 것이어서 학문을 한다고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며, 부귀를 누리는 것도 천명이 있는 것이어서 학문을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하던 학문을 팽개쳐 버리고 지금까지 해놓았던 공부도 모두 포기한다. 어떤 사람은 절반쯤 학문이 이루어졌는데도 내던져버리고 어떤 사람은 성공의 문턱까지 갔다가 주저앉아 버린다. 마치 아홉 길 높은 산을 쌓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산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게으름을 피우며 농사일을 제쳐놓은 농부와 같은 무리가 아니겠는가.

  학문을 하는 고생은 일년 내내 농사를 짓는 고생에 비하면 고생도 아니다. 그러나 학문을 해서 얻는 이익을 어찌 농사를 지어 얻은 이익에 비교 할 수 있으랴. 농사를 짓는 일은 겨우 배나 채울 수 있을 뿐이니 그 이익이 아주 하찮은 것이지만, 학문을 하면 명성을 얻게 되니 그 이익이 엄청난 것이다. 이익이 적고 고생스럽기만 한 농사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제대로 안 되는데, 더구나 조금만 고생하면 큰 이익을 얻는 학문을 함에 있어서 말해 무엇하겠는가.

  편안히 공부만 하는 사람들은 땀흘려 일을 하는 농부들의 고생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를 지어 그들을 깨우치고자 한다.

   

뇌물 먹은 소

  

종묘 사직의 제사에 검은 소를 희생으로 바치는 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제도이다. 그런데 희생에 알맞은 소가 드물고, 완전하게 털이 검은 소를 구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조정에서는 전생서(典牲書)를 설치하여 그 일을 주관하게 하고, 만일 희생에 알맞은 소를 한 마리 바치는 자가 있으면 말 세 마리로 소값을 쳐주었다. 이 때문에 그 이득을 노리고 비싼 값으로 검은 소를 사서는 권세 있는 집에 가 청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희생에 쓸 소를 계약하는 날이 되면 자신의 소를 바치려고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관청의 문 앞은 시장처럼 북적거렸다. 그렇지만 필요한 소는 한 마리뿐이므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한 사람만이 소를 바칠 수 있었다.

  용산(龍山) 땅의 어느 달관(達官)이 말이 없어 늘 근심하다가 베 20필로 소를 한 마리 샀다. 온몸이 칠흑처럼 검고 키가 한 길이나 되는 놈이었다. 소를 잘 기르는 사람에게 맡겨서 기르게 하면서, 사육하는 데에 드는 비용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렇게 한 해 겨울을 부지런히 먹이고 나니, 살이 올라 상등품 희생 소가 되었다.

  그 소를 전생서 관원에게 보였더니, 아주 휼륭하다고 하였다. 달관은 기뻐하며, 이제 뜻한 바를 이루게 되었다고 여겼다.

  어느 날 전생서 제조(提調)가 관사에 앉아서 소를 고르는데, 한 소년이 편지를 올리며 제조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알리고는 또 술을 갖고 와서 소를 맡은 담당자와 소 우리 안에서 함께 술을 마셨다.

  이윽고 전생서 관원이 들어와서 먼저 달관의 소를 들여오게 하였다. 제조가 소를 맡은 담당자를 돌아보며 어떠냐고 물으니, 담당자가,

  "소의 몸집이 우람하기는 해도 병이 들었으니 희생에 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제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소를 몰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소는 작고 비쩍 말랐는데, 담당자는,

  "소가 비록 몸집이 작기는 해도 달포쯤 잘 먹이면 희생으로 쓸 만합니다."

하였다. 제조가 웃으며 그 소를 받기로 하고, 장부에다 적었다. 관원이 항의를 하였으나 소용없었다. 몹시 실망한 달관이 소를 도로 팔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소가 병이 들어서 퇴짜를 맞았으니 희생에도 쓰지 못하며, 농사에도 적합하지 않으니, 사서 무엇에 쓰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날 지나도록 팔지를 못하다가 결국 반값에 남에게 넘기고 말았다.

  종묘와 사직의 제사에 쓰이는 희생은 신하된 자라면 반드시 유의를 해야 한다. 그리고 제조는 조정에서 함께 벼슬하는 처지로서 간사한 사람의 청탁은 따르고 달관의 말은 듣지 않아,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소를 받아들이고 물리쳐서는 안 되는 소를 물리쳤다. 그러한 짓은 나쁜 풍습을 조장할 뿐만 아니라 하늘을 업신여기며 경건한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대체로 군자와 소인이 송사를 하면 사리에 맞는 군자는 대부분 지고 사리에 맞지 않는 소인이 오히려 이긴다. 이것은 모두가 뇌물 탓이다. 옛말에도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가까이 있는 실무자에게 아첨하는 편이 낫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빈말이 아니다.

 

성 현 (1439∼1504)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용齋)ㆍ허백당(虛白堂), 시호는 문대(文戴)이다. 세조 8년(1462)에 식년문과, 4년 후에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하였다. 시문에 능하여 가형인 임(任)을 수행하여 연경을 다녀와서 관광록(觀光錄)을 지었고, 음악에 조예가 깊어 예조판서로서 「악학궤범」을 편찬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저서에 「용재총화」,「허백당집」,「부휴자담론」등이 있다.

 윗글은 그의 문집 「허백당집」권(卷)12 설조(說條)에 실린 글로서 앞글의 원제는 <타농설(惰農說)>, 뒷글의 원제는 <흑우설(黑牛說)>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