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 문학평론가


 

책을 덮었다, 가슴 한 켠이 차올랐다

2012년 마지막 북리뷰 지면입니다. 올 한 해를 마감하며 우리 시대 전문가 5명의 추천서를 모았습니다. 나름 다독가로 이름을 날린 사람들입니다. 주제는 ‘2012년 나를 움직인 책’으로 정했습니다. 정치·경제·사회 나눌 것 없이 변화가 컸던 올해 그들의 중심을 잡아줬던 책들입니다. 한국인의 고민과 소망이 담긴 책들이기도 합니다. 각기 분량은 짧지만 ‘지금, 여기’의 상황을 두루 짚어보는 혜안이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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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속임수다
리링 지음, 김숭호 옮김
글항아리, 927쪽
4만8000원


동서양 고전 읽기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뜨겁다.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물론 『논어』인데, 수많은 번역서와 해설서가 나와 있음에도 여전히 새로운 책들이 더해지고 있고 독자들의 반응도 끊이질 않는다.

 그 가운데 “『논어』가 이런 책이구나”란 감을 잡게 해준 책은 지난해에 나온 리링의 『논어, 세 번 찢기』였다. 리링은 베이징대 교수로 고고학·고문헌학·고문자학의 대가로 통한다. 『논어』를 종횡으로 읽어내는 그의 학식과 견해가 탄복할 만하여 이후엔 ‘리링의 모든 책’이다. 그가 펴낸 모든 책을 읽을 용의가 있다는 뜻이다.

 고맙게도 ‘리링 저작선’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 올해 『논어』 주석서 『집 잃은 개』와 『손자』에 대한 강의록 『전쟁은 속임수다』가 함께 나왔다. 모두 방대한 분량의 책으로 특히 『전쟁은 속임수다』는 저자가 『손자』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이유를 알게 해준다. 『손자』에 관한 고증과 고문헌적 성과에 있어서 최고 수준을 보여주는 책이다.

 리링은 중국 병법의 요체를 “전쟁에서는 속임수도 꺼리지 않는다”라는 말에서 찾는데, 그것을 “규칙이 없는 것이 바로 단 하나의 규칙이다”로 해석한다. ‘전쟁은 속임수’란 말의 뜻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는 말은 누구나 다 아는 손자의 가르침이다. 그 손자를 알려면 리링의 강의를 읽어보시길. ‘압도적!’이란 말은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이다.

로쟈 본명 이현우·서평가

경제학 혁명
데이비드 오렐 지음,
김원기 옮김
행성비, 392쪽 1만8800원


오늘날 주류 경제학은 응용수학이다. 그 창시자인 제본스와 왈라스, 파레토 모두 공학도 출신이고, 프리드먼 역시 원래 응용수학과 통계학 전공자였다. 주류경제학자들은 통계학적 방법을 쓰지 않는 학자들을 사회학자라며 비아냥거린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현대물리학에 정통한 응용수학 박사이면서 주류경제학을 ‘19세기 물리학’ 수준이라고 혹평한다. 통계학적 엄밀성과 수학적 논증의 극치를 추구한 나머지 정작 현실 경제의 변화와 위기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도 못하는 ‘뉴턴주의적 사이비 학문’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대학 시절 잠시 물리학을 공부했고 나중에 경제학을 공부한 내게 이 책의 모든 구절이 의미심장하고 통찰력 있게 다가왔다. 저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제어공학이 말하는 음의 피드백이라면, 현실 경제에서는 무수한 양의 피드백 현상이 있다고 말한다. 지금의 세계 금융위기도 양의 피드백의 시스템 파국 현상이다.

 저자는 또 “생태계는 원자론적 균형과 질서, 정규분포의 세계가 아니며 그보다는 혼동과 진화, 프랙탈 분포의 세계”라면서 “경제학은 복잡계 생물학에서 한 수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자유시장뿐만 아니라 국가 개입의 경제학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공동의지를 결집한 국가 개입만이 금융파국(양의 피드백)과 불균형적 양극화(프랙탈 분포)를 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년 간 내가 읽은 최고의 경제학 책이다.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

건축가
루스 펠터슨·레이스 옹-얀 지음
황의방 옮김,
까치376쪽, 4만원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들을 한데 소개했다. 내로라하는 건축가들이 직접 자신의 작품에 대해 한 말을 모았다. 1979년 첫 회 수상자인 필립 존슨부터 2010년 세지마 가즈요와 니시자와 류에까지, 그들이 잡지와 TV, 학회 등에서 한 인터뷰가 생생하다. 건축물에 깃든 창작자의 의도를 바로 만날 수 있다.

 이 책이 각별히 매력적이었던 건 평소 궁금해했던 질문, 즉 “건축가들의 개성은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어서였다. 건축가들은 주로 스타일과 형식에 신경쓰기보다 공간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건축물의 재료에 지나치리만치 과도하게 집착하고, 빛과 조명을 천착한다. 건축물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고 도시라는 생태적 환경에 주목하기도 하고, 건축물이 들어설 땅의 지형과 기후와 하나가 되려고 시도한다.

 건축의 역사는 물리학의 시대와 생물학의 시대를 관통해 이제 환경생태학의 시대에 도달했다. 공존, 지속가능, 기후반응, 자연친화가 그들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건축의 변천에 대한 지형도를 그리고 싶다면, 단 한 권의 책으로 우리 시대 건축을 꿰뚫고 싶다면, 이 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사물을 새롭게 인식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는 안도 다다오(1995년 수상자)의 말대로, 이 책을 덮는 순간 나를 둘러싼 건축물이 달리 보인다.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십자군 이야기 1~3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문학동네
각 권 344~600쪽
1만3800원~1만9800원


카노사의 굴욕-. 1077년 중세 유럽, 신성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굴욕 당한 자들은 분노와 앙갚음의 분출구를 요구한다. 악순환을 점화시킨 이들이 황제와 교황이었기에 이것은 개인의 문제로 끝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절치부심이 192년간 여덟 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이어지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신이 원하신다는 첫 선동이 일관된 가치였을 리는 만무하다. 그리하여 노정은 복잡하고 사연은 구구하다. 십자군 이야기는 세계 2대 종교가 격돌한 십자군 전쟁을 생생하게 그린 책이다.

 유럽과 이슬람 양편의 사료를 샅샅이 찾아내 바로 어제 일자의 신문기사처럼 엮어내는 저자의 능력은 과연 탄복스럽다. 눈앞에 복원되는 것은 사건이 아니고 거기 엮인 사람들이다. 고민하고 판단하고 후회하는 군상들. 한심한 인간들과 무심한 자연을 변수로 원정과 전쟁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게 전개됐다.

 역사는 반복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짧고 무작위 하다고 믿기에는 놀랍게 반복적이다.

 십자군은 지구 저편의 먼 이야기는 아닐까. 그러나 역사는 과거가 아니고 현재형일 때 의미가 있을 뿐이 다. 역사에 진공의 순간은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무지와 망각뿐이다.

 이 책은 그 진공을 현재형으로 채워준다. 책의 질문은 이것이다. 판단의 권력은 누가 쥐고 있느냐. 집단의 리더가 누구냐.

서현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
이반 일리치·데이비드 케일리 지음
권루시안 옮김
물레, 360쪽, 1만4000원


“병원이 건강의 장애가 되고 정당이 민주정치의 장애물이 되고 언론기관이 의사소통의 장애물이 되는 것처럼 학교는 진정한 교육의 장애가 되고 있다.”

 오스트리아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이반 일리치(1926~2002)의 말이다. 그의 주요개념 중 하나는 ‘반생산성’이다. 산업사회 스스로가 자신의 원래 목적을 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1970년대 미국에서 구입비, 기름값, 교통체증을 포함해 자동차에서 보낸 시간 등을 모두 합산하면, 사람들은 1만㎞를 이동하기 위해 한 해 평균 1600시간을 썼다. 자동차의 진짜 스피드는 지금 속도계에 찍히는 바로 그 수치가 아니라 겨우 시속 6㎞밖에 안 된다. 우리가 생산성을 향상시키려고 바친 노동이 대부분이 사실 생산성을 저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 셈이다.

 일리치는 살아있는 인간을 거대한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는 현대사회의 구조를 분석·해체해 마침내 이를 뛰어넘으려 했다.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해 어디까지 자신의 삶을 해체할 수 있는가. 그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자유라 믿는 모든 ‘안정감’이 실은 허약하기 짝이 없는 가짜 자유임을, 아프게 깨닫게 된다.

 때로는 너무 달콤하고 나른한 각종 ‘힐링’ 요법에 지친 분들에게, 죽비처럼 뒷머리를 상쾌하게 후려치는 통쾌한 지식을 필요로 하는 분들의 잠 못 드는 베갯머리에, 이 책을 슬그머니 놓아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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