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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풍류 (62)

 

풍류문학사에서 妓生(기생)만큼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온 집단이 또 있었을까? 무엇보다 기생들은 사랑과 別離(별리)를 숙명처럼 지니고 태어난 여인들이었다. 누구보다 깊은 情恨(정한)의 우물에서 井華水(정화수)처럼 맑은 詩心(시심)을 길어올렸다면 그들보다 행복하면서 불행한 족속들도 없었으리라.

한마디로 기생은 兩班(양반)들의 노리개였으나 대단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몸은 천하되 정신은 突兀(돌올)한 야누스 같은 직업이었달까? 그들은 음악과 무용은 물론이고 문학에 대해서도 전문적인 소양을 쌓은 敎養人(교양인)이었던 거다. 그 가운데서도 황진이는 특히 詩書畵(시서화)에 뛰어나 群鷄一鶴(군계일학) 같았던 名實共(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기생이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정든 임 오신 밤이어드란 굽이굽이 펴리라.

이 시조 한 편이면 황진이의 天才性(천재성)을 自明(자명)하고도 若如(약여)한 바 있으리라. 時空(시공)을 자유자재로 초월하는 상상력이야말로 발상법의 찬란한 鍊金術(연금술)인 까닭이다. 이처럼 기막힌 착상과 기발한 意匠(의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찾아보기 극히 어렵다. 진실로 한국 풍류문학의 壓卷(압권)이요 白眉編(백미편)이라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다. 王族(왕족)인 벽계수는 풍류객이었다. 황진이가 名妓(명기)라는 소문을 듣고 李達(이달)에게 도움을 청했다.

“황진이는 천하의 풍류객이 아니면 만나기 어렵다. 그대는 거문고를 잘 타니 황진이 집 옆 樓閣(누각)에 올라 한 곡조 뜯어라. 황진이가 나오면 못 본 척 나귀를 타고 가라. 吹笛橋(취적교)를 건너 때까지 뒤돌아 보지 않으면 뜻을 이루리라.” 벽계수가 거문고를 타니 과연 황진이가 나왔다. 벽계수임을 알고는 노래불렀다.

靑山裡(청산리) 碧溪水(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一到蒼海(일도창해) 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明月(명월)이 滿空山(만공산)하니 뉘어간들 어떠리.

벽계수가 놀라 뒤를 돌아보다 그만 나귀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벽계수는 名士(명사)가 아니라 다만 風流郞(풍류랑)일 뿐이로고!”

황진이는 웃으면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황진이의 기생 이름이 ‘명월’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나저나 ‘퉁소부는 다리’라는 뜻의 ‘취적교’는 얼마나 풍류스러운 이름인가? 宣傳官(선전관) 李士宗(이사종)은 노래를 잘 불렀다. 松都(송도)로 벼슬하러 가는 길에 川壽院(천수원) 냇가에서 시조창을 몇 곡 뽑았다. 황진이가 우연히 지나다 當代(당대)의 絶唱(절창)으로 소문난 이사종임을 直感(직감)으로 알았다. 意氣投合(의기투합)한 그들은 함께 살기로 했다.

먼저 3년을 황진이가 이사종 식구를 먹여 살렸다. 다음 3년은 이사종이 황진이 가족을 먹여 살렸다. 드디어 약속한 6년이 지나자 황진이는 미련 없이 떠나갔다.

어저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던가

있으랴 하였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미련 없이 떠나갔다고 했지만 어찌 아쉬움 남지 않았으랴? 그렇지 않다면 女心(여심)이 曲盡(곡진)할 리 만무하리라.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손가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임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는고.

이들은 아름답고 정겨운 山水(산수)의 對位法(대위법)을 노래한 시조들이다. 그대로 사랑과 인생의 대위법임은 물론이다. 물론 산수는 남녀나 天地(천지)처럼 陰陽(음양)의 範疇(범주)라는 사실이다.

내 언제 無信(무신)하여 임을 언제 속였관대

月枕(월침) 三更(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秋風(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천하의 명기에게 행여라도 '잘못된 뜻'이 '전혀' 있을 수 있겠는가? 오해받음은 고문 같은 형벌이기에 輾轉反側(전전반측) 잠을 이루지 못했으리라.

月下梧桐盡 (월하오동진)

霜中野菊黃 (상중야국황)

樓高天一尺 (누고천일척)

人醉酒千觴 (인취주천상)

流水和琴冷 (유수화금냉)

梅花入笛香 (매화입적향)

明朝相別後 (명조상별후)

情與碧波長 (정여벽파장)

“달 아래 오동잎 다 졌는데

서리 맞은 국화 샛노랗구나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을 듯한데

사람은 천 잔의 술에 취하누나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와 어울려 차고

매화꽃은 퉁소소리에 녹아들어 향기롭다

내일 아침 이별하고 나면

정은 푸른 물결따라 오래 흐르리라.”

蘇世讓(소세양)이 젊었을 적에 “女色(여색)에 매혹되면 남자가 아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황진이의 才色(재색)을 듣고는 “황진이와 한 달을 지낸다 해도 마음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하루라도 더 머문다면 사람이 아니다.”고 장담하였다. 말이 씨가 된다던가? 소세양이 한 달을 지내고 떠나려 하자 황진이는 위의 시를 읊었다. 소세양은 “나는 사람이 아니다.”고 탄식하면서 주저 앉았다고 한다.

誰斷崑崙玉 (수단곤륜옥)

裁成織女梳 (재성직녀소)

牽牛離別後 (견우이별후)

愁擲碧空虛 (수척벽공허)

“누가 곤륜산의 옥을 잘라내어

직녀의 빗을 만들었는가?

견우와 이별한 후

서러워 공중에 던졌도다.”

詠半月(영반월)이라는 시는 황진이의 천재적인 상상력이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된 경우다. 반달이 된 직녀의 빗이라는 聯想(연상)은 얼마쯤 참신하면서 황홀한 지경인가?

相思相見只憑夢 (상사상견지빙몽)

儂訪歡時歡訪儂 (농방환시환방농)

願使遙遙他夜夢 (원사요요타야몽)

一時同作路中逢 (일시동작노중봉)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 임도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다시 떠나 도중에서 만나고지고.”

想思夢(상사몽) 이라는 시는 金岸曙(김안서) 번역 金星泰(김성태) 작곡으로 유명해졌다. 국민 애창곡으로 지금도 중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다.

“한 줄기 물줄기 바위에서 뿜어져나와

龍(용) 같은 물줄기 백 길에 넘어 물소리 우렁차다

거꾸로 떨어져 날리는 물은 은하수 같고

성난 폭포에 가로 걸렸느니 완연한 무지개로다

어지로운 물방울이 골짜기에 가득하니

구슬과 옥이 부서진 듯 허공에 치솟는다

나그네여 廬山(여산)이 낫다고 말하지 말라

天磨山(천마산)이 海東(해동)에 으뜸임을 알지니” - 원문 생략 -

이 시의 제목은 朴淵瀑布(박연 폭포)다. 松都三絶(송도삼절)을 自負(자부)했으니만큼 박연폭포를 찾은 감회 어찌 남다른 바가 없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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