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천재형은 아니라 해도 지브란은 어쩐지 일찍 소진해버린 별 같은 존재다. 그의 나이 35세에 "예언자"가 나왔고 48세 때에는 레바논 삼나무 그늘아래에서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다.
그의 삶은 1883년에서 1931년에 걸쳐 있었다. 결코 무지개 같은 삶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영혼의 무지개"를 세상에 띄웠다
 
레바논, 미국, 파리가 그의 삶의 여정이었다. 1883년에 레바논의 한 마을 Bsharri에서 태어난 그는 189512세 때 미국 보스톤으로 온다. 이때 만난 사람이 사진작가, Fred Holland Day, 소년 지브란은 그의 모델로 자주 카메라 앞에 섰다. 그러나 2년 후 다시 레바논으로 건너가 공부한다. 그곳에는 남아있던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지낸 5년 동안(1898-1902) 그는 아랍의 문화를 깊이 습득했다
 
다시 미국에 돌아온 1902년은 지브란에게 잔인한 해였다. 누이, , 어머니를 잃은 것이다. 하지만 잃는 사람이 있으면 새로 얻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 것이 운명의 장난인가? 1904년 자신의 작품 전시장에서 운명의 여인 헤스켈(Mary Haskell)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녀의 후원으로 지브란은 1908년에 파리에 건너가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파리는 지브란을 사로잡았다. 비록 3년의 짧은 체류였지만 영향은 컸다. 뎃상에 원래 재주가 있던 소년이었지만 "윌리엄 블레이크"를 연상시키는 그의 드로잉은 이때 다듬어진 것이다
 
(지브란: 기쁨과 슬픔/사랑)
 
레바논, 미국, 파리를 거친 지브란은 이제 이로써 서구와 아랍을 동시성으로 갖는 지적-영적 나아가 예술적 지평을 가지게 되었다. 무엇인가 그로부터 창조적인 작품이 터져 나올 모든 준비가 완료된 채... 그의 성숙한 영혼의 드러남은 단지 시간의 문제였다. 1910년 이후 뉴욕에 정착한 그는 드디어 1923년에 "예언자"를 출간한다. 예언자는 그가 이미 소년시절부터 항상 품고 다니며 다듬던 글이었다. 원고가 마무리된 1920년 후에도 3년을 더 손질해서 출판사로 보낼 정도였다. 물론 완벽한 영어를 위해 헤스켈의 손길을 거쳐야했기도 했다
 
28년에는 "사람의 아들 예수"를 출간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높아갔으나 하지만 31년에 그는 아깝게도 세상을 뜬다. 간경화증이라니 술 때문이라고 하겠는데 높은 영성적 수준을 가진 그도 결국은 고독 속에서 술을 마셨다는 것은 우리를 당황케 한다. 물론 그는 이미 많은 사람들을 잃어버렸다. 어머니, , 누나, 아버지에 이어 그리고 청혼까지 했던 사랑한 후원자 헤스켈까지... 그녀는 끝내 다른 사람을 택해 재혼을 한 것이다. 이 고통은 인간으로서, 특히 지브란처럼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브란의 진정한 고독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자신에게서 젊은 시절의 활화산 같던 창조력이 고갈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지브란 같은 큰 영혼의 절망은 단순히 비련에서 찿을 수 없다. 그것은 다른 출처를 갖는 절망이었다. 바로 자신에 대한 절망이었던 것이다. 그는 결코 무명의 작가도 아니었고, 빈곤에 허덕이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너무 준엄했고, 예민했다. 절망은 고독감에로 이어졌고 결국 그는 술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죽음에로 그의 운명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31년에 사망함으로써 그는 2차 대전의 광기는 겪지 않은 채 인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지브란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명상가도, 당연히 구루도 아니었고 레바논의 토착형 기독교인 마르몬파 기독교인이었지만 성직자는 아니었고, 훈련받은 철학자도 아니었다.
 
그는...지브란이었다. 그는 어떻게 사랑, 결혼, 아이에 관하여 종교, 고통, 선악, 죽음에 관하여 그토록 아름다운 언어로 독단적이거나, 교의적이 아닌 자유, 경이, 사랑을 향해 열려있는 생각을 남길 수 있었을까? 나에게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영성적 직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린 시절부터 태생적으로 주어진 섬세한 감수성과 문학적 재능, 그리고 그가 습득한 동서양의 지혜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는 무엇보다 아랍의 지혜문학적 정신을 자신의 독특한 문체로 현대서구에 소개한 사람이다. 그것은 그가 레바논인임과 동시에 기독교, 서구라는 또 다른 그의 세계와 언어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만의 종합적 정신세계가 표출하는 이미지와 언어가 사람들의 깊은 심성에 닿았고 영혼을 뒤 흔드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사실 이점에서 지브란은 매우 독특하다. 임어당이 중국과 서구지성의 종합을 의미하고, 오쇼 라즈니쉬가 인도와 서구의 종합을 의미한다면 지브란은 아랍과 서구의 종합을 의미하는 아주 희귀한 예에 속한다. 서구문화를 축으로 그는 또한 동양인의 심성에도 호소력을 갖는 "보편적 영성의 차원"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의 글은 직관적 통찰과 근본적 지혜에 근거한다. 내용적으로는 참 자아, 사랑, 평화 같은 근본가치에 대한 "절대적" 통찰이 주를 이룬다. 얄팍한 삶의 처세와도 관계없지만 그렇다고 학문적인 반성적 철학도 아니다. 또한 종교적인 도덕 잠언류도 아니다
 
그는 현실적 생명체로서의 자아의 경계를 영원과 무한에로 확장한다. 사랑을 통하여 신에게로 가는 길-그것이 곧 참 자아에로의 길이다. 그에게 신과 참 자아는 두개의 별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사랑도 현실적 의미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신비화된 이미지로서의 사랑이다. 즉 그것은 신과 하나된 참 자아로 가는 길이요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맛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기도 했다. 역시 지브란은 "신비주의적 본질주의"에 입각해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문체는 신비적이며 자연주의적이다. 거의 모든 상황이나 잠언적 지혜가 자연과의 비유속에서 드러나고 있다. 태양, 햇볕, 이슬, , , , ...이러한 친자연주의적 이미지와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신비적 통찰력의 문학적 연결이 지브란의 세계를 낳았고, 세계인의 영혼에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는 어떠한 철학, 교리, 종교에 얽매임 없이 영혼의 순수함으로부터만, 영혼의 순수함을 위해서만 글을 썼다. 그의 유일한 종교는 바로 자신의 영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세계인의 영혼에 말을 건넬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바로 그 때문에 그의 신비주의적 언어미학배후에는 공허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는 오스만 터키로부터 독립을 위해서는 투쟁도 불사함을 주장했다. 그의 "예언자'와 사람의 아들 예수"의 모델인 바하이교 창시자 Abdu'l-Baha 의 절대 평화론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팔레스타인 지역에 기근이 엄습했을 때는 기금을 모으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상 다른 뚜렷한 실천적 모습을 찾기는 힘들다. 그는 그 자신이 알무스타파(예언자의 주인공)같은 예언자로써 선언적, 선포형 언어에 만족하고 있다. 이 한계가 그를 전형적인 모성애 추구형의 나약한 영성주의자로 보이게 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여성에게서 정신적 반려자를 찾으려는 모습은 안타깝기까지 하다.
 
이러한 경우 여성이나, 사랑 등을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오류에 빠지기 쉬움은 물론이다. 사실 지브란에게서 그 이상화 경향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지브란은 그 자신이 예언자이다. 그는 혁명가도, 사회 투쟁가도 학자도 아니었다. 우리가 그를 발견하게 되는 곳은 "예언자의 조용한 정원"에서인 것이다.
 
 
<소개>
 
레바논 북부의 베챠리에서 2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산세가 매우 험한 곳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와 인접한 곳이었다. 이런 이유로 이 지역 주민들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험한 산세 덕분에 터키 지배 하에서도 자치구역으로 남았다.
 
1869년 수에즈운하가 개통되면서 생업이던 대상(caravan)을 통한 동서교역이 타격받고 주민들은 가난과 터키의 폭정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자 예수회 교육의 영향으로 자유의식이 싹튼 지식인들은 아프리카, 남미,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으로 이민을 떠났다. 칼릴 지브란의 가족도 이러한 이민자들의 무리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189512세 때 아버지만 레바논에 남고 전가족이 미국의 보스턴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2년간 영어를 공부하고, 다시 레바논으로 돌아와 5년간 아랍어와 프랑스어를 수학했다. 그후 아버지를 따라 전국을 여행하며 그림을 그렸고, 1902년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인생체험을 쌓았다. 1908년 프랑스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할 때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을 만나 3년간 미술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으로 이민 온 어머니와 누나, 형이 결핵으로 죽고 누나와 단 둘만 남게 되었다.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보스턴의 한 출판업자의 도움으로 북디자이너로 일했다. 이때부터 화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했으며, 당시 문단에서 활약하는 젊은 작가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면서 작품 활동을 하게 되었다.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아랍어로 씌어 진 산문시들과 희곡작품들이다. 희곡은 모든 아랍권에 널리 알려져 지브라니즘(Gibranism)이라는 용어가 생길 정도였다. 20세를 전후하여 영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1923, 20년간의 구상을 거쳐 완성한 원고를 출판하기로 결심하는데, 그 작품이 바로 영어로 기록한 산문시 예언자 The Prophet이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답을 깨닫게 하여 현대의 성서라고 불리는 예언자는 아랍어로 쓴 소설 부러진 날개 The Broken Wings(1912)와 함께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사랑받고 있다. 그 후에도 여러 권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미국의 시리아계 신문에도 기고했으나, 예언자만큼 주목받지는 못했다.
 
저작들에는 그가 그린 그림들이 삽화로 실린 경우가 많다. 초상화를 비롯한 그의 그림은 철학을 느끼게 하는 독창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띠는 것으로서 웅장하고도 경이로운 레오나르도적 특질을 보여준다는 평을 얻었다. 젊은 시절 파리에서 최초의 전시회를 가진 이래 뉴욕, 보스턴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아메리카의 보헤미아라고 불리는 그리니치빌리지에서 독신으로 지내며 예술 활동에만 전념하면서 늘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주장하고, 레바논의 종교적 단합을 호소했다. 평소 타국살이의 외로움을 알코올로 달래다가 건강을 해쳐 뉴욕의 성 빈센트병원에서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독특한 종교적·역사적 배경에서 성장하여 일생을 아랍과 비아랍, 이슬람과 기독교, 레바논과 뉴욕 등 이질적인 두 세계를 넘나들면서 특유의 이중적 세계관으로 전세계의 독자들에게 시공을 초월하는 진실을 이야기함으로써 현대인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았다.
 
한국에는 1975년 처음 번역되어 국내 독서계에 칼릴 지브란의 붐을 일으켰던 산문시집 예언자를 비롯하여 첫사랑을 주제로 다룬 소설 부러진 날개, 잠언집 모래 ·물거품 Sand and Foam(1926), 우화집 방랑자(1932) 고요하여라 나의 마음이여 Prose Poems》《세월 Time and Tide》《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등 많은 작품이 소개되었다.
[출처] 칼릴 지브란 [Kahlil Gibran ]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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