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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참답게 사는 길은

生業(생업)과 道樂(도락)을 일치시키는 일.”

서양을 대표하는 ‘시인과 농부’였던 프로스트의 규정에 가장 충실했던 조선의 풍류객은 누구였을까? 장혼은 仁王山(인왕산) 아래 玉流洞(옥류동)에서 살았다. 그곳의 平民(평민) 文人(문인)들과 玉溪社(옥계사)와 松石園時社(송석원시사)를 결성하고 자주 詩會(시회)를 열었다. 그들의 詩集(시집)은 閭巷文學(여항문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그 중심인물이 장혼이였던 거다.

이러한 장혼의 일상생활과 美意識(미의식)을 대표적으로 증언해주는 작품이 ‘平生志(평생지)’라는 散文(산문)이다. “옥류동은 인왕산에서 가장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그 가운데를 맑은 시내가 흐르는데 물소리가 허리에 찬 옥이 울리는 듯, 거문고를 타는 듯하다. 비가 내리면 물이 내달리고 폭포가 떨어져 대단한 장관을 이룬다. 그 물가에서 雅趣(아취)있는 시회를 연다. 주위에는 숲이 우거지고 사람들이 그 사이에 집 짓고 산다. 洞口(동구)는 깊숙하지만 음습하지 않고 고요하면서 상쾌하다. 동구를 지나 산기슭에 당도하면 明堂(명당) 집이 있다. 頹落(퇴락)하였으나 옥류동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차고 맑은 샘물이 솟고 너럭바위와 언덕도 있어 참으로 隱者(은자)가 살만한 곳이다. 집 값을 물었더니 50貫(관)이었다. 사서 몇 칸의 집을 지을 계획을 세웠다. 우선 푸른 홰나무를 문 앞에 심어 그늘을 드리우고 벽 오동은 바깥 사랑채에 심어 달빛을 받아들인다. 포도 시렁은 그 옆에 얹어 햇볕을 막고 측백나무는 바깥채에 심어 병풍으로 삼는다. 파초 한 뿌리 심어 빗소리를 듣고 장미는 담장 모서리에, 매화는 바깥채에 숨겨 심는다. 패랭이꽃 맨드라미는 안채의 섬돌에 씨 뿌리고 두견화 철쭉은 정원에 섞어 심는다. 햇볕 잘 다는 곳에 능금 밤나무를 심고 건조한 땅에는 옥수수를 심는다. 오이는 집 앞에, 무 배추는 서쪽에 심는다. 참외와 호박은 사방 울타리에 심어 오르게 한다. 이렇게 하여 꽃이 피면 구경하고 나무가 무성하면 그 아래에서 쉬며 과일이 열리면 따고 채소가 자라면 뜯어다 먹는다. 이렇게 하면 참으로 한가롭고 여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으리라. 어찌 전원취미 뿐이겠는가? 홀로 있을 때는 거문고 어루만지고 옛 책을 펼쳐보며 때때로 산책하리라. 손님이 찾아오면 술을 마시며 시를 읊조리고 노래를 부르리라. 비 내리는 아침, 눈이 오는 한낮, 기우는 저녁 햇살, 새벽의 달빛은 이 그윽히 깊은 집의 신비로운 정취여서 다른 이들에게 설명해도 이해하기 어려울 게다. 날마나 이러한 생활을 즐기다 자손에 물려줌이 평생의 뜻이다. 운수의 열리고 막힘, 수명의 길고 짧음은 하늘에 맡길 따름이지만 불행히도 아직 자금을 마련하지 못했다. 오호라! 세상을 가벼이 여기고 고상한 뜻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이러한 집을 소유할 길이 없는 것일까? 옥류동은 인왕산 그늘에 있고 인왕산은 서울의 서쪽에 있다.”

아! 장혼처럼 到底(도저)한 전원취미의 소유자가 평생의 뜻을 이룰 수 없었음은 풍류문학사를 위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장혼의 ‘평생지’가 풍류문학사에서 독보적임은 添附(첨부)의 존재 때문이다. 그는 이 별첨 문건에다 ‘평생지’를 실천할 구체적 目錄表(목록표)를 작성해 놓았다.

자신이 누릴 행복, 사용할 물건, 해야 할 일, 보물로 여길 책, 즐기는 경치, 열어야 할 모임, 주의해야 할 사물을 차례로 열거한 것이었다.

이렇듯 ‘平生志’는 한 고결한 풍류객이 평생을 두고 꿈꾸었던 조촐한 상상의 정원에 대한 기록이다. 이 마음 속의 정원을 옛 사람들은 意園(의원)이라고 불렀다.

1. 淸福(청복) 여덟가지

태평시대에 태어난 일. 서울에서 사는 것. 요행히 선비 축에 낀 것. 글을 대충 아는 것. 산수가 아름다운 곳을 차지한 것. 꽃과 나무 천 그루를 소유한 것. 마음 맞은 벗을 얻은 것. 좋은 책을 소유한 것.

참고로 八餘居士(팔여거사)를 자처한 金正國(김정국) 이야기를 해보자. 그가 말하는 ‘여덟가지 넉넉함’은 다음과 같다. 토란국과 보리밥. 부들자리. 맑은 샘물. 서가의 책. 달빛. 솔바람 소리. 서리맞은 국화. 맑은 바람.

1. 淸供(청공) 여든 가지

옛 거문고. 옛 칼. 옛 거울. 옛 먹. 法書(법서). 名畵(명화). 端溪(단계)벼루. 湖州(호주) 붓. 이름난 香(향). 이름난 茶(차). 나무 옹이로 만든 표주박. 연적. 청주와 탁주. 바둑돌. 대나무 호리병. 책상. 차솥. 목침. 대나무 침상. 갈대 주렴. 부들 부채. 도롱이. 명아주 지팡이. 怪石(괴석). 늙은 매화. 국화. 오동나무. 파초. 포도나무. 黃庭經(황정경). 金剛經(금강경). 竹夫人(죽부인). 퉁소. 생황. 비파. 鶴(학). 뜻이 맞는 벗. (이하 생략)

3. 淸課(청과) 서른 네 가지

향 피우기. 찻물 끓이기. 낮잠 즐기기. 밤에 독서하기. 글을 평론하기. 책 쓰기. 시 짓기. 그림 그리기. 도장 새기기. 韻(운)자 고르기. 거문고 타기. 바둑 두기. 활쏘기. 投壺(투호) 놀이. 칼 감정하기. 거울 보기. 물고기 기르기. 鶴(학) 구경하기. 폭포소리 듣기. 踏淸(답청) 하기. 꽃 심기. 대나무 모종하기. 샘물 긷기. 소나무 어루만지기. 연꽃 감상하기. 국화꽃 따기. 채소 뽑기. 과일 줍기. 정원에 물주기. 눈 쓸기. 더위 식히기. 서늘한 바람 쐬기. 약 말리기. 丸藥(환약) 만들기.

4. 淸寶(청보) 백가지.

周易(주역). 詩經(시경). 書經(서경). 論語(논어). 孟子(맹자). 中庸(중용). 大學(대학). 禮記(예기). 春秋(춘추). 孔子家語(공자가어). 近思錄(근사록). 小學(소학). 國語(국어). 戰國策(전국책). 史記(사기). 漢書(한서). 資治通鑑(자치통감). 三國史(삼국사). 高麗史(고려사). 道德經(도덕경). (이하 생략)

5. 淸景(청경) 열 가지

작은 花階(화계)에서 닭과 개가 노는 광경

골짜기에 논밭이 펼쳐진 광경

밤낮으로 샘물이 흐르는 광경

嵐氣(남기) 즉 이내가 낀 산 광경

절벽에 남기 어린 광경

홀로 선 산봉우리에 落照(낙조)가 비낀 광경

아름다운 꽃의 짙은 향기

멋진 나무의 녹음

시냇물 가득한 달빛

마을에 푹 쌓인 눈

6. 淸燕(청연) 여섯 가지

음식 - 뿌리 달린 나물. 양반의 귀한 음식에 뒤지지 않는다.

장소 - 잎 달린 가지로 엮은 사립문. 대문에 뒤지지 않는다.

깔개 - 낙화가 수놓은 이끼. 비단 방석에 뒤지지 않는다.

사랑스러운 것 - 향기로운 풀과 애교스러운 꽃. 교태 부리는 기생에 뒤지지 않는다.

기호 - 황혼녘의 산빛. 비 갠 뒤의 풀빛. 빗 속의 꽃. 눈 쌓인 가지. 嶺(영) 마루의 한가로운 구 름. 나무 끝의 밝은 달.

풍악 - 바위 틈의 샘물소리. 골짜기의 솔바람소리. 한낮의 꾀꼬리 울음소리. 저녁의 매미 울음소리. 개구리 울음소리. 귀뚜라미 울음소리.

7. 淸戒(청계) 네 가지

달팽이 같은 집에 살며 좀벌레 나오는 책을 읽어도 安住(안주)한다.

헌 솜옷 입고 명아주 국을 먹어도 원망하지 않는다.

거문고와 책은 先代(선대)부터의 業(업)이니 그만두지 못한다.

산꽃과 산새들은 빈한한 나를 이해하는 친구이니 잊어서 안된다.

아! 이처럼 ‘맑은 경치’ 속에서 ‘맑은 일’을 누리며 ‘맑은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수고롭게 구하여 무얼할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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