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jpg 밟혀야 하는운명을 지닌  바닥은 언제나 갈라진 가슴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민들레가 갈라진 틈사이로 새싹을 밀어올리듯, 바닥 인생도 갈라진 틈새로 늘 희망을 꿈꾸는 가상함이 있다. 

 

바닥은 한 번도 무엇을 밟고 일어선 적이 없다. 태곳적부터 오체투지의 자세로 모든 존재의 무게를 떠받들고 산다. 퇴화된 눈으로 세상을 보나 말하지 못하는 입을 가졌고, 우격다짐으로 삼킨 눈물은 귓바퀴를 두드리다 돌아나간다. 날선 울음으로 온몸을 곧추세우고, 묵상에 잠긴 밤하늘의 독백을 듣는다. 농밀한 어둠은 본능적으로 감지할 뿐 함부로 건드렸다간 절벽 아래로 처박히는 수가 있다. 조심하라. 붉은 심장의 박동소리 같은 것은 없다. 그렇다고 죽은 것은 아니다.

지렁이 한 마리가 땅속 집을 빠져나와 용케 차도로 기어오른다. 화물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헐떡이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한나절 땡볕에 달궈진 지열이 화끈거리는지 길을 움츠렸다 폈다, 배밀이하듯 끌고 간다. 이따금 분비하는 점액질은 뼈 없는 미물들이 가지는 슬픔이다. 나비처럼 날개가 있거나 사마귀처럼 다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홀로 가는 뒷모습이 퍽 외로워 보인다. 어쩌다 힘세고 덩치 큰 녀석이 나타나면 설설 뒤로 내빼며 주춤거린다.

바닥은 자신이 쳐놓은 덫에 누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며 마른침을 삼키는 중이다. 다행히 앞서 밟고 간 생명체가 미끄러지거나 발을 헛디뎌 허우적거리면 득의만만한 미소를 짓는다. 그러고 보면 음험한 욕망이 목구멍까지 들어찬 아가리를 벌리고 먹잇감을 구하는 비겁한 포식자인가. 아니면 인간의 세속적 욕망이 나뒹굴도록 내버려두는 황량한 벌판인가. 끝없이 팽창하는 욕구를 주체하지 못한 채 좌절하고야마는 정체불명의 절망을 끌어안는 구세주인가. 먼발치에서 누가 비척이며 걸어오는 듯하다.

강물에 투신한 사내의 죽음을 읽고 있다. 신문에 단 몇 줄의 활자로 남은 인생이다.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녔거나 불치의 병마가 뒤통수를 내리쳤을 수도 있다. 또 부정과 비리에 연루되어 세상과의 연을 끊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의문사이다. 행간마다 번뇌의 괴로움으로 몸부림쳤을 불우한 날들이 촘촘히 박혀있다. 팍팍한 세상에 스스로 바닥이었음을 고백하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레테의 강을 건너간 것이리라. 하루아침에 흉측한 벌레로 변신해버린 그레고르 잠자의 절망이 오버랩 된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사지로 내몰았을까.

바닥은 곳곳에 함정을 파놓고 있다. 단 한 번의 실족으로 표적물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을 은밀히 즐기는지도 알 수 없다. 인간이 욕망의 전부를 보여주지 못하듯이 바닥도 여간해서 제 깊은 속내를 꺼내놓지 않는다. 따라서 신문 기사 속의 사내도 바닥으로 떨어지는 즉시 권력과 명예에서 축출되고 가산마저 탕진해버렸을 것이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숨기고 싶은 가난은 혼자만의 몫이 되었으며, 후회와 상실감으로 얹힌 도덕적 해이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도 기대감도 주지 못했을 터이다. 이러한 고통은 홍어가 삭는 큼큼한 맛으로 늘 그를 따라다녔고, 참담한 현실을 직시할수록 더 악착스레 들러붙었을 것 같다. 그는 어둠속에 칩거한 채 삭혀내지도 못한 비린 시간을 견뎠어야 했을 것이다.

바닥이라고 해서 다 평평한 것만은 아니다. 표면이 울퉁불퉁 튀어나온 곳도 있고, 우묵하게 파인 구덩이도 있다. 아예 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억장(億丈)이 무너진 곳도 많다. 심연(深淵)의 바닥이다. 젖은 이끼처럼 한사코 매달리는 슬픔이나 분노, 절망 등이 기식한다. 이것들의 실체는 하나같이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마치 거대한 블랙홀을 떠맡은 것 같다고나 할까. 존재가 가지는 두께나 무게로 하중을 지탱하고, 밋밋하나마 내벽을 세우고, 사물의 형태를 완성한다. 그 안에 바닥은 다소곳이 매복해 있다. 그러므로 허공에 뿌리내리는 길들은 위험하고 불안하다. 담쟁이나 나팔꽃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제 작은 손바닥으로 지지대를 꽉 움켜쥐는 것도 이 까닭이다.

인간은 바닥을 두려워한다. 아마도 태생적인 공포에서 오는 것 같다. 무의식의 저 편, 편평한 바닥이 아닌 양수에 둥둥 떠 있던 잃어버린 기억이 불쑥불쑥 나타나기 때문이리라. 살면서 느닷없이 닥친 불운을 처음엔 세상 탓으로 돌리며, 바닥으로 내몰린 처지를 완강하게 부정하고 회피하려든다. 절박한 마음에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다 나머지 생마저 불행에 저당 잡힌 채 다시 바닥에 갇히고 만다. 이런 악순환을 방관자처럼 두고 보다가 종국엔 폐허뿐인 생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것이 바닥의 오랜 관습이자 묵인된 생존법이다. 하지만 바닥 역시 굴종의 자세로 있지 않은가. 누가 제 등짝을 함부로 쥐어뜯거나 짓밟는 난동을 부려도 저항하거나 항변하지 않으며 묵묵히 참을 뿐이다.

바닥은 절망과 상생한다. 보이지 않는 안쪽이 보이는 것의 바깥쪽이듯 바닥과 절망은 서로 등을 맞대고 있다. 추락한 그 사내에게 올가미를 씌어 죽음의 밑바닥까지 떠밀어 내친 것은 순전히 절망의 독선이다. 성마른 세상에 대고 핏대를 세울수록 결핍에서 오는 상처는 짓무르면서 아물어졌을 터, 바닥은 절망과 한 몸으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를 길들이기보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의 포용으로 조력자의 후덕한 면모를 보였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 사내도 목숨을 버리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게 아닌가. 이는 바닥의 명백한 과오이며 과실이다.

사내가 추락한 지점은 어디쯤일까. 이는 낙하한 자만이 아는 선험적 직감이다. 정상(頂上)에서 곤두박질치지 못한 자는 제 생의 깊이를 모른다. 그러나 골짜기에 몸을 맡기고 흘러온 시냇물은 제 산의 높이를 안다. 강물이 낮으로는 가슴에 하늘을 담고, 밤이면 교각 아래 색색의 불빛을 늘어뜨려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은가. 이는 바닥을 향한 절망의 또 다른 몸짓이라는 것을.

사방이 바닥이다. 인간은 바닥을 벗어날 수 없다. 지렁이도 땅바닥을 떠나서는 꿈틀거리지 못한다. 도중에 몸뚱이가 잘려지는 수모를 겪고, 후려치는 장대비를 맞을지라도 생채기 난 몸으로 납작 엎드려 앞으로 기어가다보면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 산꼭대기의 바위산도 발 딛고 선 인간의 발바닥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맨발인 당신도 지금 바닥을 탈출하고 싶은가. 당신이 추락하는 지점이 바닥이라고 막연히 대답한다면 이는 아직 추락을 경험해보지 않은 행복한 넋두리일지도 모른다. 천길 벼랑에 꼬꾸라져도 다시 일어서야만 하는 곳이 바닥이다. 바닥은 끝이 아니요, 새로운 시작이다.

바닥은 천장이다. 오늘도 하루치의 절망을 포물선으로 긋는 길 위에 서 있다. 곤고한 삶이 더 이상 바닥으로 함몰하지 않고, 천장으로 솟구쳐 반등하기를 소망한다. 지상을 오르는 상승과 지하로 내려서는 하강이 팽팽히 밀고 당기는 경계지점에 바닥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자세로 있다. 어쩌다 세상사 순리에서 이탈해 나락에 빠져들었을지언정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는 공간이 바닥인 셈이다. 작은 목소리로 ‘바닥’이라고 내뱉는 순간, 날숨이 빠져나간 입천장에 따스함으로 채워지는 그런 안식처다. 어둡고 습한 긴 여정에서 빛으로 우뚝 서는 집이요, 쓰러진 자들의 은유다.

지렁이가 붉게 꽃망울을 터뜨린 배롱나무숲 그늘로 들어선다. 하루를 힘껏 가본들 천 리를 갈 것인가. 만 리를 갈 것인가. 그 때 문득 수만리 밖에서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비상하는 지렁이의 환상에 사로잡힌다. 그 뒤를 우주가 조용히 뒤따르고 있다. 그리고 가장 순한 눈빛으로 포복한 바닥을 겸허히 내려다보는 게 아닌가.

바닥은 세상을 떠받치는 힘이다. (2012년 천강문학상 수필 대상 당선작)

고경숙

경남 통영 출신

2000년 신라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200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

2011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2012년 천강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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