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이 되었어도 목덜미에 파고드는 저녁바람은 아직 바싹 날이 서 있었다. 고향엔 벌써 봄이 왔을 테지만. 공상도 때론 힘이라고 그는 뻣뻣한 입술을 애써 오므려 '제비' 노래를 휘파람으로 불어보았지만 깨진 호루라기 소리밖에는 나지 않았다. 이번엔 다시 내 고향 남쪽 바다...... 어쩌구 해보았지만 목은 이미 자라같이 움츠려들고 있었다.
그는 오늘도 멀찍이 이민국 건물이 보이는 자리에서 걸음을 늦추고 동태를 살폈다. 일찍 가서 자리를 맡는 게 목적이지만 너무 일찍 가서 경비원이나 다른 사람 눈에 띄어 상습범으로 찍히는 것도 피할 일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벌써 스무 명 남짓 벽을 따라 나란히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 보였다. 잔뜩 껴입어서 몸집들이 눈사람들 마냥 둥실했다. 털스웨터에 장갑, 모자, 털잠바는 물론이고 더러는 슬립핑백까지. 그는 줄 끝에 가서 신문지를 깔고 담요를 덮고 앉았다. 먹는 사람, 뭔가를 읽는 사람, 손가락 끝이 뚫린 장갑을 끼고 뜨개질에 열중한 아주머니...... 제각각 밤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가 이 일을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적어도 그의 생각엔 지난 석 달은 '당분간'에 불과 했다. 노느니 잠시. 당분간. 일거리가 생길 때까지만. 물론 처음 그가 이민국에 왔을 때는 그것이 수입이 생기는 일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만기가 지난 노동허가증을 갱신하려고 새벽 일찍 나왔던 것이, 이틀 연거푸 허탕을 치고, 마침 그가 일자리를 잃은 사흘째에는 허가증도 필요 없는 일거리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아, 관대한 미국! 아무려나. 고향에 단 몇 푼이라도 보낼 수 있다면.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의 식탁에 음식이 놓일 수 있다면.
기다리며 새우는 밤은 왜 항상 이리도 더디 가는지. 시계바늘은 얄미운 새 새끼처럼 깡총깡총 몇 발자국 가고는 쉬고, 또 몇 발자국에 물 마시고, 다시 몇 발자국에 하늘 보고 서 있는 모양이었다. 털모자와 목도리 사이로 빠끔히 내다보이는 하늘에는 별들이 새들이나 짚고 갈 징검다리처럼 작게 반짝이고 있었다. 졸음으로 무거운 그의 시선은 하나 둘 별들을 짚으며 가다가 자꾸만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내의 팔 다리 어깨에 새들이 옹기종기 앉아 빨간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제비가 돌아왔다고 기뻐하면서도 아내의 얼굴 한쪽은 그늘이었다. 그 그늘을 어루만져주려고 손을 뻗다가 잠이 깼다.
열시 사십 오 분. 입구에서 시작된 줄은 벌써 건물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도 밤은 조용하기만 했다. 하긴 모두들 넋은 빼어 딴 데 두고 껍데기들만 나와 줄에 서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게 어디 제정신으로 할 일인가. 저마다 뿜어내는 허연 입김만 차가운 어둠 속에서 흐물흐물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장작개비 마냥 뻣뻣해진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보았다. 넋이 맘껏 나가 놀더라도 돌아올 자리는 있어야 할 테니까. 하지만 그의 넋이 돌아오기엔 아직 이른 모양이었다.
아내가 다시 저만치 보이고 그는 꽃 한 다발을 들고 아내에게 가고 있었는데 웬 일인지 아내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고 숨만 가빠왔다. 진땀을 흘리며 깨어나 재채기를 한 시각이 열두 시 오십 분. 줄은 건물을 한 바퀴 휘감고 거리를 향해 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앞으로 다섯 시간. 그래도 날짜가 바뀌었다는 게 그에겐 위안이 되어 주었다.
다시 잠.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리고 그는 아내의 손을 잡고 아내는 또 아이의 손을 잡고 새소리를 따라 뛰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새를 잡아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가 귀를 찢는 듯한 경적소리에 잠이 깼다. 깨고 보니 옆 사람들 웃음소리였지만 그의 망막에는 깨는 순간 보았던 노란 교통표지판이 불로 새긴 듯 뚜렷이 찍혀 있었다. 일가족으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가 손을 잡고 미친 듯이 뛰어가는 실루엣. 멕시코 국경이 가까운, 그래서 불법입국자들이 많은 고속도로에서 흔히 보는 표지판이었다. 산길에는 노루조심 표지판이 있듯이.
동편 하늘이 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새를 잡아 어쩌겠다는 건가. 그 새가 제비라도 된단 말인가? 행운의 박씨를 물어오는 제비? 그는 고개를 흔들어 소름끼치는 꿈속의 영상과 함께 멍청한 생각을 지우며 일어섰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할 때가 된 것이다. 오래 웅크렸던 다리에 전기가 오르는 듯 쩌릿쩌릿한 감각이 지나가고 새 부리에 쪼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발바닥부터 올라왔다.
다섯 시 십분. 줄은 이미 건물을 세 바큇째 휘감아 가고 있었다. 어리석은 사람들. 저렇게 떨며 수퍼마켓의 냉동생선들 마냥 서 있어봐야 차례도 오지 않을 텐데. 매일 아침 기껏해야 이 백 명만 받아 서류처리를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는 혀를 차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숨을 죽였다. 웬 청년이 목발을 짚고 다리를 절며 지나갔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그는 젊은이가 한국사람인 걸 알아챘다. 말쑥한 차림에 다친 다리를 감싼 깁스에는 잔뜩 낙서가 돼있는 걸로 봐서 아마 젊은 놈들끼리 스키여행이라도 다녀온 모양이었다. 팔자 좋은 놈. 게다가 그의 본능을 증명하듯이 깁스에는 한글이 더러 눈에 띄었다. '행운의 다리'라고. 행운의 다리? 흥! 어디 얼마나 운이 좋은가 보자.
청년은 닫혀있는 입구에 서서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줄의 길이를 가늠하고 있었다. 개장 한 시간 전에야 나타나 일을 보려하다니, 쯧쯧. 그는 청년과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렸다. 말만 걸어와라. 아니 눈이라도. 그런데 그 쪽으로 걸어오던 청년은 다시 줄의 앞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앞쪽에 경쟁자가 생긴 걸까? 그는 하루 수입을 코앞에 두고도 소리쳐 부를 수 없는 자신의 멍청한 입장이 안타까웠다. 곧이어 청년이 있는 쪽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여섯 시 반에 왔소. 난 저녁 일곱 시. 앞에 선 사람들에게 대체 몇 시에 왔느냐고 묻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젯밤 일곱 시란 말이오? 보지 않아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청년의 표정이 눈에 선했다. 그 역시 처음엔 그렇게 허탕치고 돌아갔으니까. 저런 얼뜨기에게서는 적어도 백 불쯤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이백 불도 선선히 낼지 몰라. 그는 소리나지 않게 입을 오물거려 '백 불', '이백 불'을 발음해 보았다. 그럭저럭 석 달을 이 일로 버텼어도 아직 첫 마디에는 늘 말이 더듬어지고 목줄기가 타오르는 듯 싶었다. 그리고 물론 오늘 같은 경우라도 한국어로 할 생각은 없었다.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민족적 자존심까지 팔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새 개장시간이 다가왔는지 유니폼 입은 경비원들이 하나 둘 줄을 정비하러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이 청년은...... 어깨를 늘이고 어느 새 저 만치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저런 융통성 없는 놈. 저 자식은 편법이란 것도 모르나. 하룻밤 일이 또 허탕이라고 생각하니 자신이 밤새 떨고 지낸 것은 물론 꿈속에서 제비를 잡지 못한 것까지도 전부 그 청년 때문인 것처럼 청년을 향해 부아가 치밀었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야 이 새 대가리야. 속으로만 목이 터져라 멀어지는 청년을 불러댔다.
하지만 오라는 청년은 오지 않고 다리 밑에서 잠이 깬 거지만 부스스한 머리에 넝마를 담은 수레를 밀며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따로 동냥하러 다니기도 귀찮은지 늘어선 줄이 자랄 만큼 자란 요맘때에야 어슬렁어슬렁 나타나 줄 따라 한 차례 모금하고 사라지는 거지였다. 거지는 오늘 마수로 청년을 택했는지 청년을 막아서더니, 잠시 후엔 아예 청년을 앞장세우고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번엔, 이번엔 꼭 입을 열리라. 아니 딴지라도 걸어 내 앞에 넘어뜨리리라.
콴토? 어느 새 다가온 청년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쭈, 이놈 대담해진 것 봐라? 제 동족도 몰라보는 편견쟁이 같으니.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생전 처음 자신의 가무잡잡한 피부와 크고 둥근 눈매에 감사했다. 만약 청년이 알아보고 한국어로 물었다면 그는 너무 참담한 심정이 되었을 것이다.

이백, 하고 말하려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경비원이 바로 코앞을 지나갔기 때문이다. 백. 그는 저도 모르게 가격을 반으로 낮춰버린 게 속상해서 부러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청년을 외면했다. 막아선 건물 옥상에 하얀 반달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십. 이번엔 청년이 제법 낮고 견고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좋소. 그는 조금 억울했지만 유리문 안쪽에 형광등이 들어오는 걸 보고 서둘러 흥정을 끝내기로 했다. 그런데 이런 얼뜨기를 봤나. 청년은 부스럭거리며 가죽잠바 안주머니를 뒤지더니 수표책을 꺼내는 게 아닌가. 아예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를 긋자고 덤비시지. 캐쉬. 그는 화가 나서 조금 큰 소리로 말했고 제 소리에 놀라 잠시 움찔했다. 현금이 없는데...... 청년이 당황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캐쉬. 그는 지금까지의 울분을 다 토해내듯 거칠게 쏘아 박았다. 그럼, 그럼 잠시 기다려 줄 수 있소? 청년이 더듬거리며 사정하듯 말했다. 서두르시오. 그는 한숨을 삼키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줄은 이제 웅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곧 문이 열리고 그의 차례가 오고. 그러면 거래고 뭐고 수포로 돌아갈 텐데. 청년은 지금부터 두리번거리며 현금인출기를 찾으려는 모양이었다. 목발을 휘두르며 절룩절룩 달려가는 청년을 보면서 대신 달려가 주고 싶은 걸 억지로 참느라 그는 또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
일분, 이분, 개장시간은 다가오고, 앞에서부터 모금을 시작한 거지도 점점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는데 간신히 저만치 얼굴을 드러냈던 청년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다시 돌아서 뛰어가지 않는가. 아니, 저 자식이! 결국 문이 열리고 그의 앞으로 겨우 대여섯 명이 남았을 때에야 헐레벌떡 청년이 뛰어왔다. 여깄소. 반으로 접힌 돈을 세지도 않고 주머니에 넣고 난 뒤에야 그는 청년이 우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원 이렇게 거스름돈 바꾸기가 힘들어서야. 그러고 보니 녀석은 현금인출기에서 찾은 이십 불 짜리를 십 불 짜리로 바꾸느라고 다시 절룩거리며 뛰어갔다 온 게 분명했다. 아, 독한 놈 같으니. 그가 청년의 성한 다리마저 분질러주고 싶은 걸 참느라 이를 악무는데 거지가 그의 코앞에 더러운 손을 들이댔다. 거지는 제법 너그럽게 말했다.
거스름돈 없으면 내일 주쇼.
그는 청년에게서 받은 십 불 짜리를 얼결에 거지 손바닥에 놓아주고 도망치듯 돌아서 걷다가 생각했다. 오늘 저녁부터는 저 치도 같이 줄 서자고 해볼까. 하지만 곧 그 생각을 지웠다. 저마다 존중받아야 할 생존방식이 따로 있는 것이니.
그는 바람에 나뒹구는 신문지를 걷어차며 빌딩숲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문지에는 먼데서 몰려오는 제비떼를 이민절차도 없이 환영하는 축제 소식이 적혀 있었다.
이른봄부터 나타났던 거지의 별명도 제비라는 건 새들이 떠나는 겨울이 다 돼서야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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