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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닭울음소리를 듣고 눈 뜨는 새벽. 나의 창은 새 풍경화 한 점을 내어걸며  어김없이 내게 말을 걸어 온다. 날마다 새롭고 계절마다 다른 창의 초대전을 나는 ‘새벽 전람회’라 이름 지었다. 오늘도 나는 ‘새벽 전람회’의 초대에 즐거이 응하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새벽 여섯 시부터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 일곱 시까지, 딱 한 시간의 사색으로는 안성맞춤인 친구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전해주려나. 자못 궁금해진다.  아예, 몸을 창문 쪽으로 틀었다. 일찍 잠을 깬 새들이 창문 앞을 부산스럽게 지나가며 시야를 어지럽힌다. 새들이 무리지어 날아가고 하늘이 열리자, ‘못 생긴 나무’가 제일 먼저 중심 구도를 잡고 들어섰다. 마치, '못 생긴 나무'라 이름 지은 내 속내를 알아 차리기라도 한 듯 ‘오늘은 날 좀 보소’하고 항의라도 하는 모습이다. 평상시에는 우람한 올리브 나무와 멋지게 늘어진 버드나무에 가려 시선을 비껴갔던 나무다. 게다가, 하늘을 찌를 듯 멋진 구성으로 커 올라간 선인장이 형형색색의 꽃을 피울 때면 우리는 선인장 꽃에 취해 그런 나무가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못 생긴 나무'는 이 집에 이사올 때부터 못 생겨서 오히려 시선을 끌었던 나무다. 아무리 제멋대로 자란 잡목이라지만 그렇게 생기기도 쉽지 않을 성 싶다. 오죽 못 생겼으면 이름도 ‘못 생긴 나무’라 지었을까. ‘못 생긴 나무’는 50피트 쯤 되는 큰 키에 여름과 겨울이 공존하고 있는 나무다. 뿌리로부터 10피트 되는 지점에서는 잎이 풍성하여 제법 봐줄 만하다. 그런데 그 풍성한 잎들이 둥치 중간쯤에 가서는 닭 털 빠지듯 다 빠지고 온 데 간 데 없다. 그러다가, 다시 30피트쯤에서 뭉텅뭉텅 잎들을 달기 시작한다.

   잘만 컸으면, 엉덩이가 푸짐하고 가슴이 풍만한 팔등신 비키니 미녀가 될 뻔했다. 그렇게만 되었던들, 잡목에서 관상수로 신분상승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설상가상, 무리지어 피던 잎들도 이내 끊기고 나머지 10피트는 쭈뼛쭈뼛한 맨가지들로 뻗어나갔다. 때로는 끝가지들도 수묵화 한 점 쯤은 쳐낼 줄 아는데, 사방팔방 꺾여나간 이 맨가지들은 멋과는 거리가 멀다. 완전히 살점 하나 없는 닭발 그 자체다. 뿐인가. 잎이 없는 둥치나 가지는 시멘트같이 까칠한 회백색 색깔이라 영락없이 헐벗은 겨울나무다.
   이렇듯 볼 품 없이 생긴 나무는 처음부터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이런 나무를 두고 무슨 존재 가치를 따져 보겠는가. 그렇다고, 클 대로 커 버린 나무를 야박하게 베어버릴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우리 집 뒷마당은 멋지게 꾸민 정원도 아니고 자유방임형에다 원 에이크가 넘는 넓은 땅이니 못 생긴 나무도 넉넉히 품어줄 만했다. 다른 잡목들도 여럿 있어 저도 외롭지는 않을 터였다.         
   다만, 잡목 신세가 그러하듯 ‘못 생긴 나무’도 자생해야 했다. 특별히 스프링쿨러를 해서 따로 물 주는 법도 없고 관상수처럼 전지를 해 주는 법도 없다. 제 스스로 지심 깊숙이 뿌리를 내려 수분을 빨아올려야 한다. 비가 자주 오지 않는 지역이라 천수를 바라기도 쉽지 않을 터. 어쩌다 겨울비가 뿌려지면 단비인 양 흠씬 마셔두어야 한다. 그는 거리를 떠도는 고아처럼 홀로서기를 익혀야 했다. 한마디로 ‘못 생긴 나무’는 내 울 안에 있는 자식이지만 처음부터 내친 자식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나의 새벽 전람회에 주역으로 나타나서 생각을 머물게 하는 건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다.
   마침, 염소랑 닭 모이를 주며 동물농장을 한 바퀴 돌고 온 남편이 마늘빵 두 조각과 커피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 벌써 일곱 시가 된 모양이다. 마늘빵이 들어온다는 것은 먹고 출근준비를 하라는 무언의 신호다. 여느 때 같으면 충실히 그 무언의 신호에 따를 때다. 그런데 오늘은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창문 밖에 저 나무 좀 봐. 올리브 나무 옆에 있는 나무. 참 못 생겼지?”

    딱히 답을 들을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동의를 구하는 어투였다.   

    “그래도 새가 와서 깃을 치잖아.”

   조간신문을 펼치던 남편은 잠시 창밖을 보더니 대수롭잖다는 듯 대꾸했다. 
    “뭐어?"

    생각지도 않는 말에  깜짝 놀랐다.

   " 그래도 새가 와서 깃을 친다구?”

     완전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평소에 무디기만 했던 남편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다시 창밖을 보았다. 그때 ‘못 생긴 나무’ 가지 위엔 새벽 운동을 끝낸 참새들이 날아와 숨을 고르고 있었다. 몇 마리는 아직도 에너지가 남아도는지 가지마다 음표를 찍으며 포롱포롱 날아다닌다.    

   맞아! 못 생긴 나무에도 새들은 와서 노래를 하고, 깃을 치고 있었구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못 생긴 나무’도 가진 것을 내어 주며 제 목숨 값을 하고 있었구나. 남이야 뭐라 하든 말든, 저만이 가진 아름다움으로. 그리고 저만이 줄 수 있는 넉넉함으로.
    같은 나무를 보면서도 한 사람은 외양만 보고, 또 한 사람은 그가 지닌 덕을 읽고 있었다. 나는 심히 부끄러웠다. ‘못 생긴 나무’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명색이 글을 쓴다는 사람이 이토록 얕은 시선을 가지고 있다니. 아니, 이것은 단순한 시각의 차이가 아니라 심안의 차이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 내고, 들리는 것에서 들리지 않는 것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인이라 하지 않는가.
   나는 ‘못 생긴 나무’를 다시 쳐다보았다. 눈에 ‘비늘’이 벗겨졌음인가. 바람결에 나부끼는 잎새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더 없이 아름답다. 하지만, 종언을 고하며 떨어지는 잎들은 한결같이 엄숙하게 보인다. 어느 작가의 표현처럼 ‘거부하지 않는 몸짓’의  아름다운 시적 모습이 아니라, 등과 배를 뒤틀며 죽음의 고통을 거부하는 실존의 모습이다. 저나 나나 성인이 아닌 바에야 죽음을 어찌 ‘거부하지 않는’ 우아한 모습으로만 받아내랴. 사랑은 ‘아픔’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느끼는 것이라고 하던가. 그러고 보니, 닭발처럼 가늘게  뻗쳐 나간 가지들도

하늘에 올리는 은수자의 기도 같은 상상마저 든다. 세상일이란 이렇듯 보기 나름이고 생각하기 나름이런가.  
   ‘삶은 살아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육필로 쓰며 종언을 고하는 저 비장한 모습. 다시 보는 ‘못 생긴 나무‘는 더 이상 못 생긴 나무가 아니었다. 내친 자식이기는커녕, 못 생기고 부족하기에 더 챙겨주어야 할 생인손 같은 자식이었다. 못 생겨서 부끄러웠던, 그래서 숨기고 싶고, 외면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못 생긴 나무.’ 하긴, 누군들 마음의 정원에 유형무형의 '못 생긴 나무'  한 그루 없으랴. 나에게도 오래 전부터 비망록에 새겨둔 '못 생긴 나무' 한 그루 있었음을 이제는 고백해야겠다.  

   동 터오는 새벽, '못 생긴 나무'는 온 몸으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아침을 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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