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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사변이 일어난 이듬해 3월 서울이 다시 수복되자 비행기 편에 겨우 자리 하나를 얻어 단신으로 서울에 들어온 것은 비바람이 음산한 3월 29일 저녁때였다. 기약할 수 없는 스산한 마음을 안고 서울을 떠난 지 넉 달이 됐던 것이다.

멀리 포성이 으르렁대는 칠흑 같은 서울의 한밤을 어느 낯모르는 민가에서 지샌 나는 우선 전화(戰禍) 속에 남겨두고 간 박물관의 피해 조사에 온 하루 동안 여념이 없었다. 부산에 보낼 첫 보고서를 군용 비행기 편으로 써 보내고 난 그 다음날 오후 비로소 나는 마음의 여유를 얻어 경복궁 뒤뜰에 남겨두고 간 나의 사택을 방문하기로 했다. 평시와 다름없이 그대로 문을 꼭 닫아두고 떠났던 나의 서재, 그리고 독마다 담아놓고 간 싱그러운 보쌈김치 같은 것들이 그 보금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떼어 놓고 간 우리 바둑이의 가엾은 운명이 생각 키워 마음이 언짢았던 것이다.

   메마른 잡초가 우거진 경복궁 뒤 옛 뜰엔 전과 다름없이 따스한 봄볕이 짜릿하게 깃들이고 있었지만 인기척이 없는 마른 풀밭에선 굶주린 고양이가 놀라 뛰고 있었다. 풀 밭길을 걸으며 일찍이 우리 집 해묵은 기왓골이 보일 무렵에 나의 마음은 야릇한 감상에 젖어 ‘옛 고향의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순화된 감정이 되어 있었다. 나의 시선이 천천히 다가오는 나의 집 대청과 건넌방 쪽마루를 우선 더듬었을 때 나는 뜻하지 않은 일에 소스라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쪽마루 위엔 두고 간 우리 바둑이가 늘 즐겨서 앉아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납작하게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둑이는 자기를 버리고 간 매정스러운 주인의 빈 집을 지키다가 굶주림에 지쳐 죽어간 것이라는 생각이 번개같이 나의 머리를 스쳐갔다.

   그러나 나는 어느 사이에 내가 늘 밖에서 돌아올 때면 바둑이를 위하여 불던 휘파람을 “휘휘 휘요―”하고 불고 있었다. 이때 뜻밖에도 마구 구겨진 걸레조각처럼 말라 널브러져 보이던 바둑이는 머리를 기적처럼 번쩍 들고는 비틀거리는 다리로 단숨에 나에게 달려왔다. 내 발 밑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사뭇 미친 듯싶어 보였다. 나도 왈칵 눈시울이 더워와서 그를 덥석 껴안았지만 그 때 바둑이도 함께 울고 있었다. 눈물에 젖은 그의 눈은 나의 눈길을 간단없이 더듬었고 그의 메마른 입은 사정없이 그리고 그칠 줄 모르고 내 얼굴을 마구 핥고 있었다.

   나는 마치 옛 애인에게라도 하듯이, “그래그래 알았어 알았어.”하면서 그를 달래 주었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그를 버리고 갔던 자신이 부끄러웠고 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다시는 너를 떼놓지 않으리라고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넉 달 전 그를 버리고 서울을 떠나던 날은 바로 이웃 I씨에게 서울에 남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우리 바둑이를 좀 돌보아 달라고 몇 말의 먹이를 맡겨두고 나서 마치 바둑이가 말귀를 알아듣기나 하듯이 “집을 잘 보고 있으면 머지않아 다시 돌아오마, 응.” 하면서 그를 타이른 나였다. 그 후 이웃 I씨도 불과 일주일 만에 서울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 넓은 고궁 속, 춥고 시장한 한 겨우내, 공포만이 깃들인 어둡고 외로운 밤들을 우리 바둑이는 과연 무슨 수로 살아남아 준 것일까.

   나는 바둑이를 안고서 단숨에 거리로 나왔다. 우선 굶주려 지친 바둑이가 어서 무엇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세종로 네거리에 나와서도 핼쑥한 아주머니가 초콜릿이니 양담배 부스러기니 하는 따위들을 길가에 손바닥만큼 펴 놓고 텅 빈 거리를 지키고 있을 뿐 바둑이가 먹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도 그 다음날도 바둑이는 밥을 주어도 먹지 못했다. 굶주림에 지친 그의 내장은 대번에 곡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틀이 지나서야 겨우 조금씩 먹기 시작한 바둑이는 그림자처럼 한시도 내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텅 빈 서울 장안에서 안전한 숙소가 없던 당시 인기척도 없는 덕수궁 안 빈 집(미술관장 사택)에서 혼자 자야 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 때 만약 바둑이가 없었던들 그 어둡고 무거운 밤들을 아마 나 혼자 감당하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바둑이는 원래 버릇대로 방 안에는 못 들어오는 것으로 각오하고 있었다. 내가 혼자 덩그러니 어둔 방 안에서 먼 포성을 들으면서 뒤척거리고 있으면 바둑이는 내가 벗어 놓은 군화 위에 웅크리고 앉아서 숨소리를 쌔근대면서 방 안을 살피곤 했다. 때때로 문을 열고 회중전등으로 얼굴을 비춰 주면 바둑이는 웅크린 채 꼬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좋다고 한다. 방석을 주어도 밤마다 그는 내가 벗어 놓은 군화 위에만 올라 앉아 불편한 잠자리를 길들이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밤사이만이라도 떨어져 자야 하는 그리운 주인의 체취를 즐기려는 속셈이었는지 또는 겉으로는 다정한 체하면서 정 급할 때는 ‘나 몰라라’하고 사지(死地)에 자기를 버리고 가버렸던 믿지 못할 사나이가 밤사이에라도 또 잠든 틈을 타서 그 군화를 신고 그 때처럼 어디론지 훌쩍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4월 하순의 어느 날, 중공군의 제1차 춘기 공세가 서울 변두리에 다가왔다. 한밤 내 우레 같은 포성이 쉴 사이 없고 귀를 기울이면 시청 앞을 지나는 군용 차량들은 줄곧 남쪽으로 달리는 듯싶었다.

   그날 저녁 서울은 무거운 암흑 속에 산 너머의 섬광이 번뜩이는 가운데 온통 피난 때문에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바둑이는 그동안 나와 함께 두 끼를 굶고도 그림자처럼 나를 따르고 있었다. 결코 이번만은 너를 놓칠 수 없노라는 듯싶어 보였다. 가마니에 병자를 싣고 질질 끌고 가는 처절한 여인들의 모습, 그리고 나를 태워달라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는 젊은 아낙네의 울음소리가 가슴을 에는 듯한데 나는 바둑이를 안고 최후의 철수 열차에 연결한 우리 화차에 올랐다. 어두운 역두에서 방금 눈물을 닦으며 작별한 늙은 수위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바둑이와 나는 오래 응시하고 있었다.

   수십 개의 소개화차를 연결하느라고, 한밤 내 열차는 앞걸음질 뒷걸음질을 치며 난폭한 충격을 우리 화차에까지 주고 있었다. 그 때마다 바둑이는 한 번 덴 가슴에 놀라서 동요했고 가까워진 포성과 폭격의 우렛소리가 그를 자극해서 바둑이는 내 가슴에 안긴 채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훤히 날이 밝은 새벽 또 한번 큰 충격이 우리 화차에 오자 바둑이는 탈토(脫兎)같이 내 가슴을 벗어나서 벌써 레일 위를 남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나도 화차에서 뛰어내려 바둑이를 따라 달렸다. 나의 숨이 턱에 닿도록 지쳐서야 겨우 바둑이는 발랑 누워서 나에게 용서를 빌었다. 기관차는 까마득히 먼데 기적은 연거푸 울리며 우리를 부르는 듯했다.

그 때, 기차가 우리를 버리고 떠날까 봐 우리는 바로 기차가 올 레일 위를 달리고 있었다. 기관사는 이 판국에 개 한 마리가 다 무어냐고 고함을 쳤지만 나는 사과할 겨를도 기운도 없었다. 그는 불쌍한 바둑이를 내가 또다시 이 사지(死地)에 버리고 서울을 떠날 수 없는 심정을 알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바둑이의 그 후

 

   6•25 난리 속에서 일어났던 의리 깊은 우리 바둑이와 나 사이의 이야기가 중학교 국정교과서에 실린 후 여러 지방 소년 소녀들로부터 자주 편지를 받게 되었다. 그 다정한 편지들 사연 속에는 그 후 바둑이가 어찌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다.

   벌써 30년이나 지난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으므로 그 바둑이가 저승으로 돌아간 지도 이미 오래됐고 바둑이의 아들 딸들의 이야기도 좀 아리송해졌지만 생각나는 대로 그 후의 이야기를 조금 써 두고자 한다.

   굶주림과 추위와 절벽 같은 외로움 속에서 꼭 100날을 우리 바둑이는 눈에 덮인 경복궁 뒤뜰 나의 집(박물관 사택)을 지키면서 내가 돌아올 날을 기다려 준 개였다. 100일 만에 다시 만났을 때 바둑이는 지칠 대로 지쳐서 마치 걸레뭉치처럼 쪽마루 위에 늘어진 뼈와 가죽뿐이었다. 부산으로 안고 내려간 후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했지만 한 반 년 지나면서 귀여운 모습이 되살아나서 수캐들이 늠실거리기 시작했고 바둑이는 머지않아 자기를 닮은 첫 새끼들을 거느린 어미개가 되었다. 바둑이의 아들 하나는 동료이며 술친구인 K박사가 데려가더니 그의 피난살이 집 뜰에 손수 개장을 지어 주어 호강을 하게 되었다. K박사는 그 개집에 김덕구(金德狗)씨 부산 별장이라 문패를 달아 주었고 우리들에게는 그것이 피난 시름을 달래는 밝은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 아들개는 그 후 주인과 함께 한 많은 부산 별장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에 올라왔다.

   그 때 마침 서울에 환도한 경무대 발바리개 암컷이 그 배필을 구하고 있었으므로 우리 바둑이의 아들개는 경무대 발바리개의 배필로 들어갔고 이 이야기는 이미 K박사의 수필로 유명해진 이야기가 되었다.

   또, 딸개 하나는 젖도 채 떨어지기 전에 경주박물관 C박사에게 보내졌는데 어쩌다가 내가 경주에 가게 되면 어찌 나를 알아보는지 오줌을 찔끔찔끔, 데굴데굴 구르면서 미친 듯이 내 얼굴을 핥고는 했다.

   C박사와 술자리를 벌이면 으레 옆에 와 앉아서 귀염을 떨었는데 너도 한 잔 같이 하자 하고 개입에 술을 한 잔 먹여 주면 그 술기가 돌아서 비실대는 모습이 그리도 즐거웠다. 어쨌든 우리 어미 바둑이는 그 후에도 셋방살이 이웃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어서 귀여움을 받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해 보니 홀연히 온데간데 없어져서 집사람이 울상을 하고 있었다. 이웃 사람들의 말로는 바로 이웃 방에 셋방살이하는 젊은이가 우리 바둑이를 그토록 탐내서 납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들 했다. 맛있는 것으로 우리 바둑이를 꾀기 시작한 지 벌써 오래되었으며 전날 저녁 때 그 청년이 싫다는 바둑이를 억지로 안고 택시에 올라타더라는 말도 있었다. 우리 바둑이가 또 기구한 운명에 놓여졌구나 해서 마음이 언짢았다. 그 젊은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닷새째 되던 날 우리 바둑이는 거지꼴이 되어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집사람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안아 들였지만 말 못하는 바둑이의 눈길에서 우리는 그 호소를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납치되어 간 집에서 바둑이는 결사적으로 탈출해서 그리운 집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후에, 그 저주스러운 청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지만 우리 셋방으로부터 30리나 떨어진 부산시 서면(釜山市西面) 자기 부모 집으로 데리고 가서 매두었더니 사흘째 가서야 비로소 밥을 먹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안심해서 풀어주었더니 풀어주는 순간 거리로 뛰쳐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 때 우리가 살던 미아산 밑 토성동 셋방까지는 서면에서 복잡하고도 먼 거리였는데 우리 바둑이는 택시에 태워져서 어둠 속에 끌려간 그 길을 어찌 찾아왔는지 나는 그 때 개만도 못한 놈이라고 입 안에서 중얼거리는 것으로 뻔뻔스러운 납치자에 대한 분노를 삭였다.

   그로부터 우리 바둑이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저주할 사람의 짓거리가 더할 수 없이 노여웠고 그 복잡하고 낯선 길을 집까지 찾아오느라고 겪은 마음과 몸의 고초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부부는 이 가엾은 바둑이를 가축병원에 데리고 갔다. 병원에서 살아날 가망이 없지만 입원시켜 보는 것이 좋겠다 해서 입원시켰더니 나흘 만에 끝내 숨을 거두었다. 사람도 사람 나름이고 개도 개 나름이겠지만 사람보다 더 의리 깊은 개도 있고 개만도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우리 바둑이는 1948년 2월 나의 친구 H군의 사랑받는 개의 외동딸(한 마리만 낳았다)로 태어났다. 우리 친구도 개를 그리 좋아해서 이 귀여운 무남독녀 개를 너에게 맡기기로 했다고 해서 나도 그를 대견히 알아서 주먹만한 어린 것을 오버 코트 주머니에 넣고 집에 돌아왔던 것이다. 1952년 가을, 부산 가축병원에서 죽어갈 때까지 4년 반 동안의 짧은 인연이었지만 죽은 우리 바둑이에 대한 생각은 어느 한 사람에게 서린 추억 못지않게 내 마음속에 지금도 따스하게 살아 있다.

   지금 기르고 있는 우리 집 착한 바둑이의 얼굴을 가끔 유심히 들여다보고 앉아 있노라면 죽은 바둑이의 환생인 양 싶어질 때도 있고 그러노라면 개의 눈동자가 무슨 간절한 호소를 하는 듯 느껴질 때도 있다. 사람들의 욕 중에 개 같은 놈이니 개만도 못한 놈이니 하고 개욕을 도매금으로 해 넘기는 경우가 많지만 개는 그렇게 부도덕한 짐승이 아닌 것만 같다.

 

최순우   

 미술사학자. 미술펑론가. 경기도 개성 출생. 1946년 국립개성박물관 근무.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 역임. 저서 <한국미술사> 등 다수.

고유섭(高裕燮)의 감화로 한국 미술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최순우는 1946년 국립개성박물관 참사를 지내고, 1948년 서울국립박물관으로 전근하여 보급과장ㆍ미술과장ㆍ수석학예연구관ㆍ학예연구실장을 거쳐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취임한 이후 죽을 때까지 재직하며 우리 문화재를 보호하는데 평생을 바친 위대한 인물이다. 6ㆍ25사변 중에는 생명을 내걸고 소장 문화재를 부산으로 안전하게 운반하였다. 이 수필은 그 와중에서 일어난 사건을 적은 너무도 감동적이고 인간미 넘치는 글이다.

 1950년대 초반 서울 환도 등 혼란 중 국립박물관이 세 번이나 이전, 개관할 때마다 그의 공이 컸다. 1981년부터 국립박물관을 구중앙청 청사 건물로 이전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자 그 주역으로서 일하다가 제반 계획과 공사가 한창 진행되는 동안 격무와 신병으로 개관을 눈앞에 두고 순직하였다.

 최순우는 1962년 겨울부터 본격적으로 우리 나라의 도자기ㆍ목기ㆍ회화 전시를 비롯하여 ‘한국미술2천년 전시’ 등 대소 규모의 특별 전시를 수십 차례나 주관하여 한국 미술의 이해와 보존ㆍ진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국외에서도 1950∼1961년 사이 한국 미술의 미국ㆍ유럽 전시와 1976∼1984년 사이 한국미술5천년의 일본ㆍ미국ㆍ유럽 전시의 주역으로 한국 미술 문화를 세계에 크게 선양하였다. 또한 이화여자대학교ㆍ홍익대학교 등 여러 학교에 출강하여 한국ㆍ동양 미술사를 강의하면서 후학을 많이 길러내었다.

 1945년부터 5년간 문학 동인지 [순수(純粹)]의 주간도 맡은 바 있는 그는 한국 미술에 대한 주옥같은 많은 글을 발표하였다. 그의 감식안은 당대 제일로 고미술계가 혼란한 중에서도 옥석을 가리고 자신 있게 정론을 폈다. 그의 지론은 '한국 미술은 자연 그대로일 때 가장 아름다우며 미술품에 잔재주를 부리면 한국 미술의 영역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방대한 저서ㆍ논문보다는 국민을 폭넓게 이해시키기 위한 수많은 수필ㆍ논고가 있다.

오늘 소개한 수필과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가 그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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