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클라리타 쯤 왔을 때 기차 안내방송이 나왔다.

앞 기차에 문제가 있어 더 갈 수가 없다며 곧 버스로 모든 기차역으로 모셔드리겠다 한다.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의아해 하면서도 웅성거리거나 시끄럽게 소리치지 않았다.

어련히 알아서 해주랴 하는 마음으로 모두 기차에서 내렸다.

가끔 있는 일이지만, 그때마다 나는 이런 신뢰, 이런 질서가 참 좋았다.

10분 안에는 버스가 올 거라며 도착할 예정지 별로 두 팀으로 나누어 서 있으라고 했다.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은 팀과 다운타운 종착역까지 갈 팀으로 나누어 선 가운데 나는 종착역까지 가는 팀에 합류했다.

잠깐의 짜투리 시간을 쓰는 방법은 모두 제 각각이었다.

누구는 막간을 이용하여 담배를 피우고, 어떤 이는 늦어진다고 전화를 걸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이는 잘 됐다 하는 표정으로 햇볕과 바람을 즐겼다.

나는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만리무영>>. 1971년도에 성바오로 출판사에서 발간한 유니버샬 문고판이다.

제목도 예스럽고 책도 누렇게 바랜 게 마치 고서적같이 생겨 얼마 전에 다른 책들과 함께 얻어온 책이었다.

조그만 문고판이라 한 손에 들어와 서서 읽기에는 딱이었다.

그런데 나는 작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나가이 다까시!

바로 <<영원한 것을 >>하고 <<묵주알 >>을 쓴 그 작가였다.

이 <<만리무영>>은 그가 죽기 전에 쓴 마지막 작품들을 모아 묶은 책이었다.

나는 가슴이 떨려왔다. 

뜻하지 않게, 그의 모든 작품집을 갖게 된 것이었다.

원자폭탄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일생의 과업이었던 연구 논문들을 재로 만들고 죽을 날을 기다리던 나가이 박사!

그는 마지막 죽는 날까지 글로 써서 신앙을 증거하고 이 땅에 평화와 사랑을 주고 간 사람이다.

책 머리말에 나오는 얘기가 퍽 인상적이었다.

나가이씨와 병문안을 간 가다오까씨와의 대화다.

커다란 성모상 밑에 나가이씨가 누어있었다.

가다오까씨가 조심스레 인사를 건넨다.

"살아 있었군요."

"죽을 때까지는 그렇겠죠."

나가이는 흰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그러나 가다오까씨는 따라 웃을 수가 없다.

그 때, 나가이씨 침대 옆에서 간호원이 뭘 받아 적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나가이 동생 겐씨가 설명대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26인 성인에 대한 그림 연극 각본과 그림이었다.

"아니, 당신은 병자가 아닙니까?" 가다오까씨가 놀라서 묻는다.

"네. 다 죽어가고 있습죠." 나가이씨는 또 대수롭잖다는 듯이 농담 섞인 대답을 했다.

"참,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작품을 부탁하는 사람도 그렇고, 그 부탁을 받아준 사람도 딱하십니다."

가다오까씨는 안타깝다 못해 약간 화난 투로 나무란다.

"그림을 그려도 죽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죽어요."

나가이씨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는 베갯머리에서 흔들리는 촛불을 보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이 촛불이 거의 다 타버리려고 할 때 당신은, 어허! 저 촛불이 다 타버리겠네 하며 일도 하지 않고 그대로 보고만 있겠습니까?

아니면, 그 촛불이 다 타버리기 전에 일을 하겠습니까? 내 생명의 불꽃은 지금 다 타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어허, 저것 봐 하고 떠들기보다는 생명의 불꽃이 계속 되고 있는 동안 나에게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누구도 그의 말을 거스릴 수가 없었다.

그 때, 그는 한 병자에 불과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동적인 글로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 책과도 예사 인연이 아니다.

죽음을 앞두고 쓴 작가와 임종 직전까지 40년이 넘도록 책을 간직해 온 팔순의 독자.

그리고 암 말기 환자인  할머니 독자를 간병하다 책을 얻게 된 나.

도대체 우리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어 이렇게 시공간을 통하여 연결된 것일까.

우연한 인연으로, 나는 한 달간 이 할머니 간병을 도와주게 되었다.

평소에도 독서를 좋아하시고 평생 일기를 쓰신 분이라고 들었다.

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좋은 벗이 되어,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 기대도 했었다.

하지만, 내가 만났을 때는 거의 죽음에 임박한 시간으로  말씀하는 게 힘든 상태라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아드님도  이제 더 이상 어머님께서 책을 읽으실 수 없으니 도서관에나 기증해야 겠다며 모든 책을 정리하려 했다.

원래, 나는 서탐이 많아 책을 보자마자 몇 권 골라 오게 되었는데 <<만리무영>>이 그 중의 한 권이다.

만약, 내가 없을 때 책을 정리해 버렸다면 나와 만날 수 없었던 책이다.

모든 만남이 그렇듯, 책도 인연이 있어야 만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나가이 다까시 작품집은 신앙 에세이를 쓰려는 내게 본이 될 만한 귀한 책이다.

미우라 아야꼬보다 훨씬 영성적 깊이가 있고 따뜻한 휴매니티가 흐른다.

때문에, 나가이 다까시 글을 읽을 때마다 거의 존경에 가까운 마음으로 읽는다.

이 세상에는 책의 홍수니 바다니 하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수한 책이 있다.

그 중에서도 내 손에 잡히고 읽혀지는 책은 예사 인연이 아니다.

 

책에 빠져있는 동안 버스가 왔다.

기차 대신 버스에 오른 사람들은 다시 제 각각의 모습으로 목적지를 향해 간다.

어떤 사람은 생각에 잠겨 창 밖을 보고, 몇 몇 사람은 옆 사람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흔들리는 버스가 요람인 양 자리에 앉자마자 잠에 빠져든다.

나는 흔들리는 버스 속에서도 <<만리무영>>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다시 한 번 책표지를 어루만졌다.

임종을 앞둔 할머니의 젊은 날과 함께 했었고, 이제는 민들레꽃씨가 되어 나의 가슴에 안긴 책, <<만리무영>>.

나가이 다까시는 떠났지만, 이렇게 가슴과 가슴을 적시며 생명을 이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귀한 책인가.

제 각각의 모습으로 목적지를 향해 가듯이 우리 모두는 제 각각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나는 책과 더불어 벗하고, 글과 더불어 살아가고 싶다.

나는 언제쯤 이런 생명 있는 글을 쓸 수 있을는지.

창 밖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