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메이트 데레사가 아침부터 함박 웃음을 준다. 커튼 하나를 걷고,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며 차차차 스텝을 밟는데 여념이 없다. 아침 운동이라고 한다. 신나는 표정에 몸놀림도 유연하다. 열 여섯 살 때부터 춤을 즐겼다고 한다.

   어제는 휴일이라 함께 냉장고를 사러 베스트 바이로 갔다. 센스도 빠르고, 동작도 기민하고, 따스한 마음을 지닌 그녀가 좋다. 처음 이사 왔을 때, 조그만 냉장고를 하나 줬는데, 음식 해 먹는 걸 좋아하는 나에겐 턱없이 부족했다. 거의 두 달 넘게 음식 해 먹는 재미를 보지 못하고 살아 왔다.
   냉장고 큰 걸 하나 사야 되겠다고 노래 불렀는데, 마침 데레사가  같이 나가자고 앞장섰다. '그래, 이제 집에도 들어가지 않을 건데, 맛 있는 거나 해 먹고 은퇴할 때까지 데레사랑 여기서 즐겁게 살아야 겠다!'하고 마음 먹고 흔쾌히 따라 나섰다. 부엌 공간이 넉넉한 만큼, 나중을 생각해서 큼직한 냉장고를 샀다.
     이것 저것 구경을 하다, 우린 숏다리인만치 높고 좁은 사이즈보다, 낮고 넓은 걸 사자며 의논을 맞췄다.
그때, 둘이서 하는 얘기를 듣고 젊은 미국 여직원 둘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우리도 둘이 키를 재어 보이며, 난쟁이과를 면한 정도라며 웃음을 더해 주었다. 그래도 아들 낳고 딸 낳고 만세 삼창한 우리가 아닌가.
  우리에게 친밀감을 느낀 여직원은 능수능란한 몸짓으로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냉장고 가격은 프리 딜리버리에 599불. 내부 공간도 넓고 분할이 잘 되어 편리하게 쓸 수 있을 것같아 주저없이 결정했다. 3월 20일, 월요일 오전 여덟 시에 딜리버리해 주겠다는 말을 뒤로 하고 비 뿌리는 거리로 나섰다.
  지리를 잘 모르는 나를 대신하여 시간을 보내준 데레사가 고마워 밥을 사겠다고 했다. 목이 칼칼하니 감기가 올 것같아 뜨거운 걸 먹자며 '북창동 순두부'집으로 정했다. 
 운전하는 나에게 요리조리 가는 길을 자상하게도 가르쳐 준다. 우리는 보슬보슬 비 내리는 길을 헤쳐가며 즐거운 담소를 나누곤 깔깔댔다. 데레사도 나와의 외출이 무척이나 즐거운 듯, 올드 팝송 CD에서 흘러나오는 딜라일라를 신나게 따라 부른다. 나도 'I understand' 'Seald with a kiss'를 허밍으로 흥얼거리며 향수에 젖었다.
  데레사는 칠십 대 월남 여인. 나한테는 언니뻘이다. 삼십 년 전에 남편을 잃고 지금까지 혼자 산다고 한다.
앞으로도 계속 혼자 살거라고 한다. 병으로 돌아가셨냐는 질문에 월남 전쟁 중에 죽었다고 한다. 공군 파일럿이며 아주 핸섬했다고 회상어린 말로 들려준다.
  그는 이제 죽고 없으니, 보이 프랜드라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더니, 아니라며 자기 가슴에는 오직 그 사람만이 살아 있다고 한다. 사랑 받고 사랑했노라고 한다. 나는 데레사를 보며, ' 넌, 참 행복한 여인'이라고 말해 주었다.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단 한 번도 참사랑을 못해보고 가는 사람도 있는데, 데레사는 사랑 복을 누렸으니 얼마나 좋은가 했다.
  즐거운 담소를 나누며 '북창동 순두부'집에 들어섰다. 그녀를 위한 해물 순두부와 갈비 콤비네이션을 시켰다. 맵기는 보통으로. 그녀와 나는 식성도 비슷했다. 생각하고 추구하는 게 맞고 정서도 통한다.
  이미 한국 여행은 한 번 갔다 왔지만, 내가 한국 나갈 때 다시 한 번 가고 싶다고 한다. 풍경이며 음식, 패션 모두가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모든 게 흥미롭고 호기심을 유발한다는 그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어도 즐겁다.
  우리는 언젠가 시간이 맞으면, 기차를 타고 산타 바바라 올드 미션 여행을 가자며 약속했다. 바닷가를 끼고 느릿느릿하게 돌아가는 기차를 타고  데레사와 함께 살아온 얘기를 나누며 가는 여행. 그건 어쩌면 어제로 가는 추억 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데레사는 종교도 나와 같은 가톨릭에, 성당에서 토요 월남어 교사로 봉사하고 있다. 한 때, 내가 성당에서 한글 교사로 봉사한 것과 상통하여 더욱 정이 간다. 방에서 차차차로 몸을 푼 데레사는 어느 새 쏙 차려입고 외출 준비에 나선다.
  "잠깐! 나, 지금 너에  대한 글 쓰고 있어!" 하고 멈추어 세웠더니, "오, 마이 갓!" 하며 활짝 웃는다. 그래도 잠시 포즈를 취해주어 사진을 한 장 더 찍었다. 즉석 사진이지만, 함께 장소를 정하고 햇살을 고려해 이곳 저곳 자리를 잡는 그 짧은 순간도 우린 즐거웠다.
  그야말로, 여인의 전당이다. 그의 여동생 헬렌도 그렇고, 언니 데레사도 그렇고, 우린 긍정적인 사고 방식으로 즐겁게 살아가는 여인들이다. 여긴, 여인들의 이야기가 꽃 피는 살아있는 공간이다.
  데레사와 살게 된 건 작년 12월, 이제 석 달 남짓 들어선다. 직장이 가까운 건 좋지만, 아파트에 나와 사니 강아지를 데리고 올 수 없어 안타까웠다. 그 얘기를 들은 직장 동료 헬렌이 거리는 좀 멀지만 카풀로 다니면 괜찮다며 강아지를 데리고 자기 사는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대학생 아들 하나 데리고 사는 헬렌은 언니하고 사는데 하우스가 크다고. 대신, 50불만 더 엑스트라로 내면 된단다. 방값도 싸고 강아지를 데리고 올 수 있다는 말에 혹해서 당장 이사를 했다.
  하지만, 내 강아지 피터 녀석이 그동안을 참지 못하고 내가 데리러 갈 수 없는 나라로 가 버렸다. 그것도 하필이면, 내가 데리러 가기 하루 전날인 크리스마스 이브 12월 24일. 베갯잇을 적시며 누워있는 나에게 데레사는 "I Know, I know..."하며 위로해 주었다.
  이제 내가 이 먼 하우스에서 꼭 살아야할 이유가 없어졌다. 하지만, 명랑쾌활한 데레사와 몇 마디 말은 없지만 속정이 깊은 헬렌과  함께 사는 건 호흡처럼 편해진 사이가 되었다. 드는 정은 몰랐지만, 나는 정이 아쉬워 계속 같이 살기로 했다. 냉장고 사는 문제도 다시 LA로 나가나, 아니면 여기 Anaheim에 눌러 사나 하는 갈등 때문에 미루어 오던  터였다.
  이젠 냉장고도 큼지막한 거 샀으니, 맛있는 음식도 해 먹으며 인생의 여정에서 만난 멋진 여인들과 재미있게 살아 봐야겠다. 오늘 하루는 데레사가 준 즐거움만으로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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