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부부 -

 

골골이 패인 주름

논두렁 밭두렁엔

 

피고 진 세워들이

이랑이랑 물결지고

 

웃음꽃 눈물꽃 어우러져

예쁘게도 피더라

 

 

   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면 차를 가지고 다닐 때보다 훨씬 다양한 풍경을 만나게 된다. 그것도 내가 제일 흥미로워하는 사람 풍경이다.

    오늘은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휠체어에 앉은 할아버지를 힘겹게 모시고 올라왔다. 내겐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다. 환자보다 젊은 사람이 모시고 오르는 게 다반사라, 휠체어를 밀며 오르는 호호백발 할머니 모습이 내겐 퍽 낯설게 보였다. 나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모두가 자리를 비키며 일어서자, 기사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빈 공간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휠체어를 다루는 할머니 모습이 힘에 부쳐 보여도 한 두 번 다뤄본 솜씨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수 년 간 그렇게 할아버지를 모셔온 듯했다.

    휠체어에 앉으신 할아버지가 자리를 잡고 멍-하니 초점 잃은 시선을 창밖에 꽂자, 그제서야 할머니도 짐칸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으셨다. 잠깐이나마, 쉼을 위해 눈을 붙이려는 심사였다.

    골골이 주름이 잡힌 할머니의 얼굴에서 고단한 삶의 흔적을 읽는다. 몇 년이나 할아버지 수발을 들으셨을까, 돌봐줄 자식들은 없나, 나라에서 돈이 나올 텐데 간병인도 없나. 갖가지 상념에 잠기며 노후를 함께 보내는 은빛 부부들을 떠올린다.

추억의 통로를 함께 걸어온 사람들. 한 쪽에서 생각나?”하고 물으면 다른 한 쪽에서 그럼! 생각나고말고!”하고 흔쾌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 가끔은 싸우고 화해하며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지 하며 마음을 고쳐먹는 사람들. 꽃의 열기가 아닌 잎의 온기로 살아가는 사람들. 평화롭고 따뜻한 은빛 부부들의 노후를 연상해 본다.

    이북에서 내려와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이타적 삶을 사시다 가신 장기려 박사님이 생각난다. 그 분은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자기는 책을 읽고 아내는 빨래를 다리던 어느 햇빛 따스한 오후를 떠올렸다. 그때, 그는 나는 참사랑을 하고 있구나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한 풍경일 뿐인데, 어찌하여 그때 그 분은 마음 깊이 참사랑을 느끼셨을까. 그리고 어찌하여 그 순간의 한 감정만으로 평생 참사람을 지켜오실 수 있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사랑이란 요란한 것도 아니요, 대단한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깊은 강물처럼 수심이 깊을수록 고요한 사랑, 함께 있으면 오후의 따순 햇살처럼 가슴 속으로 퍼지는 평화로움. 뭐 그런 소소한 감정이 아닐까 싶다.

은빛 갈대꽃은 가을이 깊어감에 따라 더 희고 깨끗하다. 그리고 더욱 풍성해진다. 비록 할머니 얼굴엔 고단한 삶이 골골이 묻어나고 힘겨워 보이지만, 그래도 함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호들갑스럽게 생색내지 않고, 대단히 감사할 것도 없다는 듯이 덤덤한 사랑. 은빛 갈대 같은 그 노부부는 그런 사랑 하나 남겨두고 라 브레아에서 내렸다. 지는 노을이 굽은 할머니의 등을 어루만지듯 가만가만 쓸어주었다.